[시론/김용희]세밑, 희망을 꿈꾸고 싶다

  • 입력 2007년 12월 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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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이면 유독 먹을 것이 그리워진다. 어릴 적 방 안에 있을라치면 창문 너머로 메밀묵 찹쌀떡 장수가 돌아다녔다. 언니 동생과 군용 담요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찐 고구마를 소반에 들고 들어오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버스정류장 옆엔 군용 야전잠바를 입은 아저씨가 밤과 고구마를 연방 구워 내곤 했다. 저녁이 되면 카바이드 불이 세워지고 야바위꾼이 모여들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 시루떡과 팥죽을 파는 아낙도 있었다.

화려한 불빛 속 쓸쓸한 군상

사람이 변했을까. 아니 여전히 지하철역 근처에서 사람들은 따뜻한 것 주변에 옹기종기 서 있다. 포장마차에서 꼬치어묵과 떡볶이, 찐만두가 더운 김을 연방 뿜어 낸다. 이따금 눈발이 날리자 외투에 몸을 찔러 넣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때마침 찻길 가에 세워져 있던 대통령 선거 유세 차량에서 후보 지지 노래가 흘러나온다. 마이크에서는 수도 없이 듣던 상대 당에 대한 비방이 흘러나온다. 따뜻한 먹을 것을 찾는 사람과 선거 유세에 여념이 없는 유세 차량이 있는 풍경.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이 서 있는 겨울의 한복판이다.

BBK 김경준, 삼성비자금과 김용철. 사람들은 거친 항의를 하며 촛불을 들었다. 유세장으로 몰려가기도 했다. 지지하는 후보자에게 환호를 보낸다. 언론을 도배하는 수많은 말, 거짓말과 음모론, 공작정치와 조작설. 누군가를 끝없이 비난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누군가는 유서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어머니 도움 받기도 이제 지쳤어요. 어머니가 집도 사 주고, 생활비 다 대 줬는데….” 이혼한 서른 살의 남자는 일용직 직장마저 잃자 어린 딸을 숨지게 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겨울철 난방은 은행이 최고죠. 그러나 잘 수 있는 곳은 감방밖에 없죠.” 겨울철 딱히 갈 곳이 없던 출소자는 일부러 죄를 짓고 감옥으로 돌아갔다.

도심의 음식점은 송년회로 북적거린다. 연말은 화려한 불빛과 캐럴로 요란하다. 누군가는 선거 유세에 여념이 없다. 누군가는 멋진 송년모임 계획으로 정신이 없다. 눈 오는 겨울밤, 나는 문득 저 산속에 웅크리고 있을 산짐승을 생각한다.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던 집 없는 고양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차가운 감방에 누워 있을 죄수와 겨울 새벽 역 광장에서 일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사내들을, 만삭의 아내를 두고 외지 공사판을 돌아다니는 굴착기 기사와 러닝셔츠 한 장만 한 창문을 달고 겨울 햇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반지하 셋방 네 가족을 생각한다. 지하철 안에서 엄마와 함께 점자책을 열심히 읽던 시각장애 소년의 해맑은 눈빛과 크리스마스의 가난한 연인을 생각한다. 24시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백수, 비정규직 노동자와 겨울 거리의 수많은 노점상을 생각한다.

낮은 곳 되돌아보는 시간 되길

대선 후보의 유세 차량에서 수없는 비방이 흘러나온다. 어떤 분노가, 어떤 슬픔이 가슴 밑을 흐른다. 그러나 저 공허한 어떤 공약과 비방보다 이 구체적인 따뜻함과 슬픔을 떠올려 본다. 따뜻한 먹을 것과 희망을 염원해 본다.

이제 일 년 치 손때가 묻은 달력을 서서히 내려야 할 때다. 곧 새로운 다이어리를 장만해야 하리라. 저 겨울 산 속 너구리의 겨울잠을 생각하면서 다시 오게 될 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붕어빵을 호호 불어 가며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싶다. 새벽 공사판 인부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처럼. 꺼지는 한이 있어도 드러눕지 않는 불꽃처럼 말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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