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삼일로 창고극장, 32년의 분투

  • 입력 2007년 11월 14일 20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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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저동1가 삼일로 언덕배기. 주택가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에 소극장이 하나 숨어 있다. 삼일로 창고극장이다. 2층의 작은 갤러리에는 흑백사진 21장이 걸려 있다. ‘티타임의 정사’ ‘유리동물원’ ‘빠알간 피터의 고백’ ‘오델로’ ‘한여름 밤의 꿈’…. 창고극장이 문을 연 1975년 이후 초창기 10년간의 공연작들이다.

어느 극장에나 있을 법한 사진들이지만 그렇지 않다. 창고극장만의 훈장이다. 30년 넘게, 그것도 한자리를 지켜 온 민간 소극장은 창고극장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30년 풍파를 헤쳐 온 유일한 소극장

1970년대 중반은 우리 연극사에서 소극장 운동이 달아오른 시기였다. 무대를 얻은 연극인들은 신이 났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소극장은 실험정신으로 뜨거웠다. 그즈음에 문을 연 민간 소극장이 공간사랑, 민예소극장, 실험극장소극장, 엘칸토소극장, 중앙소극장, 76소극장, 삼일로 창고극장 등이다. 지금은 모두 기록 속으로 사라지고 창고극장만 남았다.

삼일로 창고극장을 처음 알았을 때 유독 ‘창고’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가정집을 개조하고 단원들이 땅바닥을 파서 만든 허름한 극장이지만 우리에겐 열정이 있다는, 배고픈 연극인들의 오기가 읽혔다. 세월이 흘러 창고극장은 우리나라 소극장 운동의 본산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숱한 화제작이 무대를 달궈 왔고, 훗날 이름을 날리는 연출가와 배우들도 이곳에서 몸을 세웠다.

며칠 전 창고극장에서 ‘국물 있사옵니다’(이근삼 작, 극단 신화)라는 연극을 봤다. 거의 30년 만에 들른 셈이다. 계단식 좌석이 의자로 바뀌었을 뿐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였다. 젊은 날의 나와 오십 줄에 들어선 내가 함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자꾸만 극장 내부를 둘러봤다. 오래된 극장만이 줄 수 있는 덤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창고극장의 오늘 뒤엔 곡절도 많았다. ‘에저또 창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뒤 수시로 대표가 바뀌며 ‘삼일로 창고극장’, ‘떼아뜨르 추’, 다시 ‘삼일로 창고극장’ ‘명동 창고극장’으로 간판을 바꿔 달아야 했다. 운영난 때문이었다. 한때 김치공장과 인쇄소로 쓰인 적도 있었다. 지금은 2003년에 사재를 털어 인수한 공연음악 작곡가 정대경 씨가 ‘삼일로 창고극장’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세입자 신세다.

대학로에 관객을 빼앗겨 고민하는 창고극장은 요즘 존폐의 불안까지 안고 산다. 이 일대를 사서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명동성당 성역화’ 계획 때문이다. 지역주민과 연극인들의 반대로 일단 잠잠해졌지만 언제 문을 닫으라고 할지 모를 일이다. 세입자 처지에선 반대에도 한계가 있다. 정 대표는 “유서 깊은 극장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만은 막고 싶다”고했다. 당국과의 협의를 원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극평론가 이진아 씨는 한 잡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는 수세기를 거슬러 온 연극 공간, 몇백 년 된 연극 공간은 없다. 그러나 앞으로 지켜야 할 연극 공간, 후배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연극 공간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지켜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존폐 위기서 구해 내 후대에 물려줘야

마침 서울시에서 ‘대학로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한다. 더 많은 공연장과 연습실을 만들어 싼값에 주겠다는 것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화는 쇼핑과 다르다. 대형 마켓처럼 뭐든지 살 수 있는, 공연장이 100곳이 넘는다는 대학로도 필요하다. 그러나 창고극장처럼 외딴곳에서 연륜과 고집과 실험을 파는 곳도 있어야 한다. 문화도시를 표방하는 서울시가 명동성당과 협의해 보존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년은 우리나라에 신극이 도입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런 나라에서 30년씩이나 버텨온 소극장을 위기 속에 방치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이끼 낀 시간의 무게다. 삼일로 창고극장은 그걸 갖고 있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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