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부산을 향한 老兵들의 묵념

  • 입력 2007년 11월 11일 20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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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전 11시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이곳에 묻힌 유엔군 전사자 2300여 명의 넋을 기리는 군악대의 진혼 나팔소리가 장중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시간 미국 등 6·25전쟁 참전 7개국의 노병들은 각기 자기 나라의 참전 기념 장소에서 일제히 부산을 향해 묵념을 올렸다. ‘부산을 향하여(turn toward Busan)’라는 행사였다.

11월 11일은 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이자 영국 연방 5개국의 현충일이다. 이날 ‘부산을 향하여’ 행사는 캐나다 한국전쟁참전협회 빈센트 커트니 회장의 제안으로 이뤄져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6·25 참전용사들이 참여했다. 백발의 노병들은 57년 전의 참전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 앞에 머리를 숙였다. 세계 평화를 위한 침략자 격퇴라는 유엔군 파병의 의미도 되새겼다.

그렇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다. 북한 공산군에게 낙동강까지 쫓겨 내려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자유의 땅을 되찾아 준 은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김일성 김정일 체제 아래 신음하며 살아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참전 16개국과 참전용사들에게 고마워하고 있는가. 그런 역사적 사실조차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인천 앞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려던 일부 단체의 행동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다. 하기야 2002년 서해교전 때 순국한 우리 해군 장병 6명에게조차 고마워하기는커녕, 정권이 앞장서서 우리 탓으로 돌리는 마당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지난주 미국을 방문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한껏 강조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해변에서 스러져 간 20대 미국 청년들이 프랑스의 자유를 위해 흘린 피를 프랑스인들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미국은 우리를 (나치로부터) 해방시켜 줬고 우리는 평생 미국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라크에서) 미군 병사가 쓰러질 때마다 미군이 프랑스를 위해 치른 희생을 생각합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가 15분간의 연설 중에 박수를 29번 받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비전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은 데 대해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프랑스는 한동안 영어를 거부하고 프랑스어만 고집할 정도로 콧대 높던 나라였다. 그런 나라라고 해서 사르코지 대통령을 자주(自主)의식이 없는 ‘사대주의자’로 볼 것인가.

국방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준비 안 된 자주론(自主論)과 해외 파병에 대한 일부 대선 후보의 용병론(傭兵論)은 미국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다. 국군의 자존심을 훼손하고 반세기 이상 국가안보의 근간이 돼 온 한미동맹을 깎아내리는 무책임한 주장이다. 국민의 방위비 부담은 턱없이 늘리면서도 안보를 위기에 빠뜨리는 자충수(自充手)다. 주한미군이 한 명도 없어야 ‘자주’로 알고, 평화를 위한 이라크 파병을 ‘용병’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집단방위체제의 근본을 모르는 소치다.

그런 논리라면 미군이 다수 주둔하고 있는 일본 독일 터키 등도 자주 국가가 아니며, 주둔 비용 일부를 우리가 대는 주한미군은 우리의 용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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