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재규]연구토양 없이 노벨상 열매 바라나

  • 입력 2007년 10월 1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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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노벨상의 영예가 우리나라에 주어지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영예이지만 국가적 자존심이 된 듯, 우리 사회는 안타까워한다. 수상 후보로 유력하던 고은 시인께 박수를 보내며, 후일을 기약한다. 왜냐하면 수상만큼 중요한 것은 수상할 만한 업적이 많은 나라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비 규모 中-日5분의 1 수준

이런 시각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작가 도리스 레싱 씨의 여유로운 반응에서 교훈을 얻는다. 노벨상위원회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상을 주지 않고 배기겠느냐는 식의 자신감이다. 자신의 업적이 노벨상의 객관성을 확인해 주는 잣대가 되는 듯한 당당함이다. 우리에게 이런 자신감은 사치일지 모르지만, 이런 정신을 간직하는 것이 노벨상보다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노벨상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 있는가는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것은 노벨상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를 열어 가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다소 성격이 다르지만 과학 및 경제학상의 배출 토양은 연구 중심 대학이다. 그러므로 노벨상이란 열매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노벨상의 그루터기가 되는 연구 중심 대학이란 나무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가를 진단해야 한다.

첫째는 역시 연구 역량의 집중과 선택의 문제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비는 2006년도 기준 27조 원 규모로 국민총생산(GNP) 대비 비율 면에서 세계 5위 수준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그 절대규모 면에서는 미국의 12분의 1, 심지어 중국과 일본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미국이 산업 연구개발(R&D)의 90%를 대학과 공동으로 수행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10% 수준이다. 이런 구조에서 미국 대학과 경쟁하기는 정말 어렵다.

유일한 방법은 선택과 집중이지만 우리는 지나친 형평성 논리의 덫에 걸려 있다. 이 덫을 넘어서는 용단 없이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 과학자는 연구자이면서 또한 생활인이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올해 서울대 공대에서 교수를 임용하지 못한 것은 우수 인재들이 기러기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그냥 미국에 눌러 있으려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란다. 이 문제는 노벨상과 동떨어진 것 같지만 젊은 과학자들의 회귀를 막는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유수 대학에 아시아계 교수와 학생이 절반을 이루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와 생활 여건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연구 평가의 방법이 문제가 된다. 대학의 평가에 과학논문색인(SCI)에 등재된 국제 학술논문 게재 편수를 반영한다. 이 평가 기준은 우리나라 학자들의 국제적 위상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기준이 노벨상을 배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논문의 편수에 집착하게 되면 근본적이고 새로운 문제보다 논문으로서 실패할 위험성이 낮은 문제를 다루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는 이미 미래의 노벨상을 받을 만한 주제가 아니다.

대학서 창의적 연구 高평가해야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대학은 ‘높은 목표-높은 위험’의 창의적 연구를 장려하도록 승진 심사 기준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제한된 교수와 연구비로 세계에서 1등을 할 수 있는 연구 주제를 교수 개인 차원이 아닌 대학 차원에서 선택해 그 분야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최대 규모와 연구의 질을 유지해야 한다. 그 주제는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할 미래의 청정에너지와 물 생산기술에서 찾으면 어떨까?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과 미래의 노벨상 씨앗이 여기에 있다.

이재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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