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칼럼]權勢를 사랑한 큐레이터

  • 입력 2007년 9월 14일 20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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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이 시작될 무렵 성곡미술관에서 미국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윌리엄 웨그먼의 작품들을 관람한 적이 있다. 엽서와 연하장을 이용해 강렬한 색채로 그린 풍경화가 이색적이었다. 그날 미술계의 신데렐라 신정아 씨를 처음 만났다.

미적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솔직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은 아니었다. 작품을 설명하는 화술(話術)도 보통이었다. 30대 중반의 여성이 성취한 눈부신 학력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기억의 창고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대 중퇴(‘중퇴 학력’에는 대개 가짜가 많음)에 미국 캔자스주립대 졸업, MBA, 예일대 미술사 박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 갔다. 돌이켜 보면 그가 거짓말을 정말 태연하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쟁이에는 네 유형이 있다. 첫 번째가 어쩌다 하는 거짓말쟁이로 대부분 사람들이 이 유형에 해당한다. 아내가 화장을 마치고 “나 예뻐” 하고 물으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예뻐”라고 하는 거짓말이다. 두 번째는 빈번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서부터 위험해진다. 세 번째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다. 네 번째는 거짓말을 해야 생계를 영위하는 직업적인 거짓말쟁이다.

습관성 거짓말의 눈부신 성취

신 씨는 세 번째 유형의 거짓말쟁이였다.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는 표정 어조(語調)나 보디랭귀지로는 거짓말을 포착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거짓말하는 데 너무 익숙해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지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갈수록 증상이 심해진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이들의 거짓말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내용과 환경을 꼼꼼히 따져보는 도리밖에 없다.

관람을 마치고 성곡미술관 정원 나무 그늘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예술의 깊은 곳에 접근하기에는 지식이 짧아 신 씨에게 미술작품 투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박수근 천경자 같은 화가가 한창 활동할 때 작품을 사 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은 투자이겠느냐” 같은 껄렁한 질문을 던졌다. 신 씨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는 “현재 이름이 높지 않아 그림값이 싸지만 장래성이 있는 화가의 그림을 개인적으로 사서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미술관의 큐레이터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신 씨의 미술품 투자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큐레이터들은 화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화가들이 그림을 그냥 주거나 싸게 팔 수 있습니다. 미술계에서 큐레이터나 미술관 관장은 그림 투자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증권회사 직원들의 주식 투자를 내부자거래로 보는 것과 같지요.”

성(性)로비에 비해서는 너무 하찮은 윤리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예견(豫見) 능력이 형편없어 미술관에서 만났던 큐레이터가 정권을 흔드는 태풍의 눈이 되리라고는 미처 짐작도 못했다.

신 씨와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의 e메일 로맨스는 추석 명절의 화제를 독점할 흥행 요소를 확실하게 갖추고 있다. 정말 ‘깜이 되는’ 논픽션이다.

도덕적 우월의식에 빠져 있는 청와대에도 치명상을 입혔다. 여직원들이 야한 소설 ‘강안남자’를 연재하는 신문을 절독(絶讀)할 만큼 윤리적 집단결벽증이 있는 듯하던 청와대에서 장관급 정책실장은 ‘18세 인증’이 필요한 내용의 e메일을 수백 통 주고받았다.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은 거짓말을 검증 없이 퍼 나르는 창구로 전락했다. 이런 부실 시스템과 변 전 실장 같은 공직자들을 언론의 취재로부터 차단하는 제도가 이름하여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다.

큐레이터는 정치적 문화적 권세(權勢)를 사랑했다. 그는 “변 씨 정도가 배후면 수없이 많다”는 말을 했다. 변 씨 하나만으로도 비리(非理)백화점인데 수없이 많다니, 청와대와 범여권을 휩쓰는 쓰나미가 몰려올 모양이다. 지금까지는 서막(序幕)에 불과한 느낌이다.

“안으로 썩은 羊頭狗肉정권”

신 씨 사건이 관객을 몰아가는 바람에 신당 경선은 파리를 날린다. 이해찬 후보가 단일화까지 이루었는데, 복병이 뛰쳐나오면 어쩌나 하는 궁금증은 생긴다. 대통령이 변 실장 때문에 “난감하다”고 하던 날 대통령 부인이 변 전 실장 부인을 따로 만난 것도 시기와 정황상 미묘하다. “힐러리처럼 대처(對處)를 잘하라”는 말도 흔쾌하지 않다.

마지막까지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대충 보따리를 싸는 분위기다. 핀잔을 들으면서도 한결같이 대통령을 역성들던 한 경제인은 “경제를 개판 쳐도 그래도 도덕성은 나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신정아 정윤재 사건을 보니 안으로 폭삭 썩은 양두구육(羊頭狗肉) 정권”이라고 말했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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