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정탁]방송언어, 최소한의 言格도 없나

  • 입력 2007년 8월 2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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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것은 표현 방식이 요란하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사람을 죽이더라도 총 한 방이면 되는데 죽은 사람에게 몇 차례나 총을 더 쏘아 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천박한 표현 방식이지만 이런 식의 살인 장면에 대중은 환호하고, 또 몰린다.

축구에서도 할리우드 액션이라는 것이 있는데 일종의 과잉 피해 행위를 말한다. 이런 요란한 행위를 학문적으로는 과잉기표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잉기표는 할리우드 영화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자신이 이런 표현 방식의 충실한 소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광고 소비 행위도 그중 하나다.

광고란 따지고 보면 별로 있지 않은 제품 간 차이를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이다. 예를 들어 A커피와 B커피 사이에 맛 차이가 별로 없는데도 사람들이 맛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광고 모델이나 광고 카피가 만들어 낸 결과 때문이다. 즉 광고에 등장한 모델의 차이가 제품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셈인데 소비자는 이 모델이 만든 차이에 따라 제품을 선택한다.

지난해 작고한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현상을 두고 우리는 오늘날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는 기호 소비가 그 극을 달리고 있다. 어떤 옷, 어떤 집, 어떤 차. 이런 것들이 우리 인격을 마구 재단하고 있다. 그래서 ‘차격(車格)’ 같은 것이 우리의 인격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런 식의 기호 소비는 비단 상품 소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의 대화에서도 기호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 별로 소개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누군가에게 그 사람을 인상 깊게 소개해야만 할 때 우리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미사여구란 일종의 과잉기표인 셈이다.

그런데 과잉기표의 남발은 커뮤니케이션의 진정성을 위협한다. 한마디로 은유의 가능성을 없애기 때문이다. 은유란 언어와 문자라는 매체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상의 표현방식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수사학은 인문학의 핵심이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은유의 보고인 시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과잉기표의 남발은 결국 우리 문화의 잠재력을 파괴하는 일에 해당한다.

최근 젊은이들의 언어가 우리 문화를 크게 오염시키는 듯하다. 휴대전화로, e메일로 메시지를 보낼 때 오로지 ‘더 빨리, 더 멀리, 더 많이’라는 기능적 측면이 이들의 커뮤니케이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의 일상 대화에서도 시적 은유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방송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 알량한 시청률이 과잉기표 사용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탓이다.

최근 인기 방송인 윤종신 씨의 여성 비하 발언 스캔들도 그중 하나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요즈음 방송에서 다반사로 발생하는 것 중 단적인 사례일 뿐이다. 주로 음악을 들려주던 1980년대의 젊은 세대 방송과는 달리 요즈음은 연예인의 시답잖은 이야기로 빼곡히 채워지는 사례가 많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갖고서 청취율을 올리려니 자연 진행자는 과잉기표를 남발하게 된다.

어쨌든 요즈음의 방송을 들으면서 저속한 언어 사용에 대한 최소한의 규제 장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아니 방송매체 종사자들에게 대중문화를 선도한다는 최소한의 자부심이 있는지 더욱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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