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국가들의 세계, 군벌들의 세계

  • 입력 2007년 8월 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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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갈래로 나눠진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언론인 출신 국제문제 평론가인 로버트 캐플런의 글이었다. 당시엔 그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념적 조언자’로 불린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의 논지는 사뭇 도발적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국경은 의미가 없어졌으며 국가의 지배가 무력화된 지역에서는 무장한 군벌들이 실질적인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지역은 정상적인 ‘국가들’의 세계와 달리 폭력과 불안정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등이 있는 서아프리카 해안지대를 먼저 입에 올렸다. 우리가 보기엔 멀쩡한 중앙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파키스탄과 인도 등도 거론했다. 나아가 그는 다가오는 시대에 이 같은 경향이 더욱 만연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책을 접한 2001년 당시에는 칼럼들을 짜깁기한 듯한 그의 책(‘무정부시대가 오는가’·코기토)이 같잖게 보였다. 어느 시대와 지역에나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무장세력이 있지만 국가 활동을 통한 무역과 교섭, 구호가 이뤄지지 않는 통치라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책을 접고 한 달 뒤 9·11테러가 터졌다. 캐플런의 이념적 제자라는 부시 대통령의 군대는 테러분자들을 쫓아 중앙아시아 산악지대를 누볐다. 이 지역의 군벌 지배도 곧 종식될 것으로 여겨졌다. 미군은 이어 이라크에도 진입해 사담 후세인의 동상을 쓰러뜨렸다.

이 같은 작전의 결과 세계는 평화로워졌는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은 오히려 늘어났다.

파키스탄 북부에서는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무장 근본주의 종교집단이 배후의 테러세력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캐플런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최적지로 삼았던 서아프리카 지역은 어떤가. 최근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무대가 이 지역의 시에라리온이다. 무장세력은 라이베리아나 기니 등의 국경을 예전보다 더욱 거리낌 없이 넘나든다. 코코아조차도 이 지역에서는 군벌들의 이익을 위해 탈취되는 ‘블러드 코코아’가 됐다고 본보 7월 7일자 기사는 전한다.

더욱 두려운 사실은 어느 정부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무장세력들이 다이아몬드나 코코아 못지않게 ‘인명’ 거래를 존립 기반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본보 1일자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매년 1만 건 이상의 납치극이 벌어지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몸값만도 연 5억 달러에 이른다.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우리 선원들을 억류한 범인들도, 나이지리아 대우건설 현장을 습격한 자들도 이 같은 탈국가 비정부 무장세력이다. 국가의 ‘인프라’에 의존하지 않는 위성전화를 갖춤으로써 이들의 활동은 더욱 초국가적이 됐다. 이들이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존재 인정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인질을 활용한다는 사실도 이제 우리는 뚜렷이 실감하게 됐다.

캐플런의 예언이 맞는다면 미래의 세계는 국가들의 클럽과 군벌들이 지배하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세계로 양분될 것이다. 그 속에서 전자가 후자를 모른 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기란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순간 우리 ‘국가’가 이국의 무장세력에 맞서 벌이는 힘겨운 협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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