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성희]대학 총장의 위기

  • 입력 2007년 6월 27일 20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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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판서(六判書)가 삼정승(三政丞) 중 하나를 못 당하고, 삼정승이 대제학(大提學) 하나를 못 당한다.’ 조선시대 대제학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대제학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에 소속된 정2품이지만 학식과 덕망이 만인의 귀감이 되어야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대제학은 전임자의 추천이 있어야 임금이 임명할 수 있었고 종신직이었다.

조선의 대제학과 현대의 대학 총장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서울대 총장을 말할 때 대제학을 떠올리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대학이 늘어나면서 대학 총장도 많아지고 그 역할도 학문의 수호자에서 최고경영자(CEO)로 바뀌고 있지만 대학 총장에게 ‘지성의 대표자’이기를 바라는 사회의 기대치는 여전히 높다.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를 우대하는 것이야 좋은 전통이지만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학문이 정치권력에 봉사한 사례가 더 많았다. 유럽의 대학들도 중세에는 제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보호’를 위장한 교황과 황제의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대학들은 간섭에 맞서 싸웠다. 대학들이 교회나 왕권과 대립하며 스스로 자신의 입지와 영향력을 확대해 왔던 것이다. 성직자의 특권이 교수와 학생에게 확대 적용된 것도 그런 ‘투쟁의 결과’였다.

유럽에서 자유와 자율을 본질로 하는 대학의 전통은 그런 과정을 거쳐 구축됐고 미국으로 전해졌다. 대학 총장에 대한 미국 사회의 존경심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하버드대 총장을 ‘공화국 제1의 시민’이라고 칭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선 유명 대학 총장의 인사(人事) 뉴스가 가볍게 취급되지만, 미국 영국 등의 유명 대학 총장 교체 소식은 톱뉴스를 장식한다. 대학 총장이 주도하는 커리큘럼 개편이나 모금 활동은 바로 사회적 어젠다가 된다.

그제 대통령과 대학 총장들의 청와대 대좌는 안타깝게도 2007년 대한민국 대학의 현주소와 함께 대학 총장들이 권력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보여 주고 말았다. 대통령이 전국의 대학 총장들을 이런 식으로 불러 모아 ‘가르치는’ 나라가 선진 민주국가 중엔 없지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야 검사든 기자든 ‘맞장 토론’을 하자는 캐릭터이니 그렇다고 치자. 교육인적자원부가 참가를 독려했다고는 하지만 뻔히 예상되는 대통령의 ‘일장 훈계’ 앞에서 ‘고개 숙인 침묵’으로 일관하려고 152명의 총장님이 청와대로 모여들었단 말인가.

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는 강자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여러분은 성공한 사람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된다”며 총장님들을 몰아붙였다. 총장들은 대입 규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은 채 재정 지원을 늘려 달라는 청원을 주로 올렸다고 한다. 대학 교육의 자율성을 지켜 낼 의지도 용기도 없는 총장들이 정부 예산만 조금 더 따내면 ‘인재양성, 교육입국’을 이루어 낼 것인가.

이석우 전 경희대 교수는 저서 ‘대학의 역사’에서 “(유럽의) 중세 대학도 학사문제, 등록금, 학교 구성원 간 이해(利害) 상충 등 많은 난제를 안고 있었다”면서 “대학의 자율성 확보는 그것을 지켜 내는 대학의 의지와 사회의 동의가 있었을 때 가능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제 청와대 풍경은 대학의 위기와 총장님들의 위기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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