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성호]민주주의의 聖과 俗

  • 입력 2007년 6월 2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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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는 사회경제적 근대화의 추동력을 세계관의 탈주술화(脫呪術化)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근대적 세계관의 본질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모든 믿음을 미신의 영역으로 격하하고, 대신 과학이 만들어 낸 기계적 세계관으로만 세상을 이해하려는 데 있다.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나 관료제적 사회조직의 발전 뒤에는 합리적 이성의 등장과 종교적 영성(靈性)의 퇴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도 탈주술화 과정의 일환으로 등장한다. 나라님이 신령한 존재라고 백성들이 믿는 한 민주주의는 없다. 권력자의 신성(神性)을 박탈하고, 그 권력을 창출한 것은 우리 보통사람이라는 이성적인 자의식이 확산된 연후에야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법이다. 민주주의는 무릇 권력이라는 우상의 파괴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우상 파괴는 민주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가끔씩 시위에나 가담하는 ‘민중’, 선거 때 표만 던지는 ‘국민’을 갖고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다. 참여의 미명을 빌려 집단화한 사익을 추구하는 ‘군중’으로는 그나마 싹튼 민주주의마저 고사(枯死)하기 십상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공공선(公共善)을 위해 지속적으로 공화국의 자치(自治)에 참여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공공선 위한 풀뿌리 참여가 힘

문제는 탈주술화된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마음속에 어떤 공적 참여에 대한 열정을 심을 수 있을지에 있다.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는 적극적인 시민의식이란 냉철한 이성적 판단, 이해득실 계산의 피안에 있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뜨거운 확신에서 기인한다. 실천이 수반되는 강렬한 신념이란 이성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유사종교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그래서 장 자크 루소는 작위적으로 창출된 공화국 역시 ‘시민종교’(civil religion)라는 비(非)이성적인 외피를 둘러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화국의 성스러움이 어느 정도 유지되어야만 공익 구현을 위한 시민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일종의 우상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된 공화국인 미국의 예를 들어 보자.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사회의 구심점은 헌법이다. 이민자들의 귀화 예식에서 헌법이 가장 큰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성경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선포가 기독교인으로 거듭남을 증거하듯이, 미국인으로의 귀화는 헌법에 대한 충성 서약이 공증(公證)한다. 헌법이야말로 미국사회의 게토(ghetto)화를 막는 동시에 공화국 전체의 공공선을 위한 풀뿌리 참여를 가능케 해주는 힘이다. 미합중국(美合衆國)의 그 다양한 중(衆)이 합(合)하고 있는 것도, 국(國)의 공익을 위한 중(衆)의 참여가 지속되는 것도 많은 부분 헌법에 대한 시민종교적 숭배의 덕분이다.

시민종교의 가치는 다른 오래된 민주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시민이 공화주의라는 대의에 대해, 또 영국 시민이 그들만의 관습에 대해 가지는 종교적 애착심이 다 그 좋은 방례다. 역으로 ‘이성적 공화주의’에 의지했던 독일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자멸은 시민종교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는 좋은 반면교사다. 바이마르 정치사에서 자주 접하는 ‘과잉 민주주의’나 ‘민주주의의 자살’과 같은 한탄도 다 시민종교적 감성과 탈주술화한 이성 사이의 균형상실에 대한 우려나 다름없다. 결국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sustainable democracy)는 항상 성(聖)과 속(俗),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민주화가 우상파괴 그쳐선 안돼

민주화가 단순히 우상 파괴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번 파괴된 성스러움은 쉽사리 복원될 수 없다. 성스러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속된 우리 시대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보며 근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상 파괴의 질풍노도가 지나간 후 과연 어떤 공동체적 가치가 살아남아 우리를 시민으로 만들고 묶어 줄지.

올해로 민주화 20년, 내년에는 건국 60주년을 맞이한다. 그 사이에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이 끼어 있다. 지금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우상과 이성, 그 성과 속을 다시 고민할 때다.

김성호 객원논설위원·연세대 교수 sunghoki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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