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레이건의 11번째 계명

  • 입력 2007년 6월 24일 19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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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미국 대선은 한국 언론에도 자주 거론될 정도로 많은 의미를 남겼다. 암살된 존 F 케네디의 잔여 임기를 마치고 4년 임기의 대통령에 도전한 린든 존슨 민주당 후보와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의 대결이었다. 결과는 4312만9484표(61.1%) 대 2717만8188표(38.5%)로 골드워터의 참담한 패배였다. 이 패배는 미국 보수파에 엄청난 충격을 줘 1980년대 새로운 보수주의 전성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어린 소녀가 꽃잎을 하나씩 뜯으며 숫자를 세 나가는 순간 핵폭발의 버섯구름이 TV 화면을 뒤덮는 장면으로 끝나는 악명 높은 네거티브 캠페인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공화당 후보 지명전에서 경쟁자 넬슨 록펠러가 골드워터를 ‘핵전쟁을 불사할 극단주의자’로 몰고 간 것이다. 골드워터는 후보가 되긴 했지만 경선이 남긴 그의 이미지는 엉망이었고 본선 결과는 정치사에 남는 최악의 패배였다. 전적으로 공화당의 자해(自害)가 낳은 결과였다.

“너의 동지 공화당원을 욕하지 말라”고 한 이른바 ‘레이건의 11번째 계명(기독교의 십계명에 빗댄 표현)’은 1964년 대선이 남긴 또 하나의 교훈이다. 공화당을 기사회생시킨 로널드 레이건은 골드워터의 찬조 연설자였다.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그는 2년 전 대선 참패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레이건은 “너의 동지 공화당원을 욕하지 말라”를 선거 구호로 내세워 결국 승리했다.

4월 26일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 때 방청석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레이건의 계명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에게 “민주당 후보들끼리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후보들끼리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미국 정치인이 모두 레이건의 계명을 지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 같지는 않다. 한나라당 대선주자 진영 간의 검증 난타전은 레이건의 계명을 생각나게 한다. 2002년 대선 때 당한 ‘김대업 수법’을 ‘동지’에게 써먹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정도이니 말이다. 미워하면서 배운다던가. 김대업이라면 치를 떨면서도 그들은 지금 김대업 흉내를 내고 있다.

이회창 씨의 훈수는 ‘역시 당해 본 사람은 다르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그는 “나중에 진짜 싸움이 있는데도 집안싸움에서 상대를 죽이기로 작심한 것 같다”면서 “검증을 통해 완전히 면역된 후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박근혜 캠프는 “누가 더 흠이 적나 따져 보자”면서 지지자들을 짜증나게 하고 있다.

“내가 아니어도 좋지만 당신이 되는 꼴은 못 본다”는 발상이 아니라면 당내 네거티브 공방에 자제심이 필요하다. 지난 대선의 경험에 비춰 지금 제기되는 의혹들은 선거 때까지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제2의 김대업’이 어디선가 웃고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언론과 국민의 몫인 검증을 자청했으니 검증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남의 이름으로 갖고 있는 땅이 없다는 증거를 대라”거나 “여권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식의 공방은 그야말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런 검증 싸움은 자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누가 더 흠이 적으냐’가 아니라 ‘내가 더 능력 있다’가 선택 기준이 되도록 경선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모두 살 수 있는 길이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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