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통일은 ‘평양 양복’처럼 온다

  • 입력 2007년 6월 22일 19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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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6·15축전에 참석했던 남한 측 인사 24명이 현지에서 양복을 맞춰 입었다고 한다. 한 벌 값이 우리 돈으로 10만 원 안팎일 정도로 싼 데다가 품질도 좋아서 숙소인 양각도호텔 3층 양복점으로 줄줄이 달려갔다는 것이다. 입소문이 돌아 다른 사람들도 맞추려 했으나 양복점 측에서 “날짜를 지키기 어렵다”며 더는 주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주위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명색이 민족·통일 문제를 논의하러 간 사람들이 웬 양복인가. 평양에 도착해 짐도 풀지 않고 양복점으로 몰려간 걸 보면 서울서부터 계획이 서 있었다는 얘기인데,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을 둔 듯해 누군들 좋은 소리를 하겠는가. “굶주리는 북 주민을 생각하면 그 돈을 꼭 그렇게 써야 했느냐”는 지적도 있다.

값싸고 질 좋은 10만 원대 양복

북한 근로자의 평균 월급이 우리 돈으로 1000원 남짓이고 보면 10만 원은 큰돈이다. 한 푼도 쓰지 않고 10년 가까이 모아야 만질 수 있는 돈이다. 이런 큰돈을 양복 맞추는 데 썼으니 친북, 반북을 떠나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민족끼리’라는 말도 민족의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다짐 아닌가. 그 돈의 일부라도 북의 탁아소에 전달했더라면 모양이 좋았을 뻔했다. 집에 가면 입지도 않고 옷장에 처박아 둔 양복이 많을 텐데 또 양복이라니….

그럼에도 나는 역설적으로 이들의 양복 맞추기에서 통일운동의 바른 방향을 본다. 거창한 이념이나 구호보다도 삶의 구체적 마디에서 이뤄지는 이런 현실적인 거래들이 쌓여서 통일의 물꼬를 튼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념 과잉과 교조화(敎條化)는 통일에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다. 특정인을 거명해서 안됐지만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의 경우를 보자.

그도 양복을 맞춘 사람 중 하나다. 그는 북으로부터 냉대를 받아 본행사 때 주석단에 앉지도 못했다. “반민족, 반통일 세력인 한나라당 의원을 앉힐 수 없다”며 북측이 착석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남북 대표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져 축전은 파행을 거듭했다. 그래도 그는 주문했던 양복을 찾아 입고 돌아왔다. 번듯한 감색 양복이었다. 나는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북의 한나라당 배제 시도와 값싸고 질 좋은 양복은 별개다. 이념과 실리(實利)가 분리되어야 대화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양복을 맞춰 입었다. 평소 ‘자주’를 부르짖고 반미(反美)를 노래해 온 그들로선 개량한복을 맞추는 것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역시 양복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무대 위에선 치열한 반미, 자주화 투쟁이 계속됐지만 무대 뒤에선 싸고 좋은 양복을 맞춰 입느라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줄을 서서 치수를 재고 시침질을 했던 것이다. 붉은 깃발이 양복점에서나마 잠시 쉬었던 것이다.

가치중립적이긴 하지만 통일운동은 이런 식으로 일어나야 한다. 북한이 6·15축전 준비에 돈을 얼마나 썼는지 몰라도 우리 측 대표단의 방북(訪北)에는 4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 돈이 가슴 뭉클한 통일 구호와 감동적인 연설로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통일은커녕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에 조금이마나 도움이 됐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햇볕정책의 성과라고? 보탬은 됐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1970년대 이래 모든 정권이 일관되게 북한의 연방제를 거부하면서 기능주의적 통합론을 펴온 결실이라고 해야 옳다. 햇볕정책도 기능주의의 한 지류에 불과했지만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되어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 반민족, 반평화 세력으로 몰아붙인 게 지난 10년이다. 그 결과가 끝없는 대북 퍼주기요, 오만방자한 북의 행태요, 그리고 마침내 핵무장이다.

‘완장’찬 대북정책이 햇볕정책

역대 모든 정권이 구사했던 대북 포용정책에 ‘햇볕정책’이라는 완장(腕章)을 달아 줬더니 갑자기 평화와 통일의 사도가 되어 온 국민을 좌우로 나눠 놓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햇볕정책’이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어떤 대북정책도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고유명사화(化)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 종착점은 이념화된 독선이다.

‘평양 양복’은 양복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값이 싸고 품질이 좋아 맞춰 입었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그것이 다시 무슨 무슨 정책의 산물(産物)이 돼선 곤란하다. 12월 대선은 그런 허위와 위선을 벗어던지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평양 양복’은 양복일 뿐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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