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결정적 순간?

  • 입력 2007년 6월 20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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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책을 우연히 집었다. 김진홍(목사) 김용택(시인) 박원순(변호사) 안철수(벤처기업가) 임진모(음악평론가) 윤무부(새 박사) 씨 등 명사들이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대해 짧게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뭔가를 이룬 사람의 삶은 뭉클하기에, 그 계기가 궁금했으나 대부분의 필자는 ‘결정적 순간이 아닌 순간은 없다’고 했다. 소설가 양귀자 씨는 책에서 “섬광 같은 찰나도 있지만, 미미한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가끔은 섬광처럼 빛을 발할 수도 있다”고 썼다.

경기도 탄천변의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들꽃을 봐도 그렇다. 여린 싹이 미세한 틈을 뚫기 시작한 찰나도, 싹을 틔운 뒤 비바람을 견디며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는 그 순간도 결정적이다. 꽃이 새 씨앗을 품은 순간은 말할 것도 없다.

결정적 순간은 신화일 수 있다. 그 순간의 발광(發光)만 부각시킨다면, 그것을 이루기까지 쌓아 온 오랜 고뇌와 몸짓이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싹트는 순간이 생명의 떨림이 들리는 결정적인 때일지언정, 꽃에게는 생을 이루는 수많은 순간 중 하나다.

기업에도 회사의 명운이 엇갈릴 순간이 있다고 한다. 기업의 성공 사례는 투자 시기나 업종 선택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코카콜라를 제치고 정상에 오른 펩시의 마케팅 전략, 2001년 MP3 플레이어의 대중화를 불러온 애플의 아이팟, 1983년 삼성의 글로벌 토대를 다진 반도체 투자 결정, 1982년 자사의 해열 진통제를 복용한 이의 사망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존슨앤드존슨의 위기관리….

그러나 그 결정이 어디 리더만의 위대한 결단이었겠는가. 기업 내 인재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여러 시나리오를 내놨을 것이고, 리더가 고뇌 끝에 그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 순간이 신화로 통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설명하기 어렵다.

실패 사례도 마찬가지다. KBS가 수신료 인상안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여론은 냉담하다. KBS의 한 관계자는 “정연주 사장이 취임한 이후 제대로 개혁을 했거나 편파 방송에 대한 지적이 없었다면…” 하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정 사장 이후 진행된 ‘독단적 개혁’이나 편파 논란만 변수라고 하면 KBS의 고질적 문제들이 묻혀 버린다.

이렇게 보면 올해 대선을 둘러싸고 정치인의 입에서 나오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도 정략적인 수사에 불과하다. 한편에서는 좌파 무능 정권을 끝장내야 하고, 한편에서는 수구 냉전 세력의 집권을 저지해야 한다고 하지만 유권자의 속내에는 양귀자 씨의 비유대로 이미 ‘미미한 결정의 순간들’이 쌓여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역대 대통령에게 ‘기대 끝에 좌절’을 겪곤 했지만 자기 삶을 꾸려 왔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데도 무한 경쟁의 세계무대에서 기죽지 않고 이만 한 반석에 오른 것도 국민 덕분이다.

그러기에 대선의 시기에 국운을 건다며 막판 대형 이슈로 판을 흔들려는 정치인을 경계해야 할 것 같다. 그런 결정적 순간은 덜렁 오지도 않고, 대통령 혼자만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지금 우리 삶과 사회를 매끄럽게 굴러가게 하는 ‘작은 결정’들이 더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의 소중함을 보여 줄 때가 오고 있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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