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칼럼]껍데기 벗겨라!

  • 입력 2007년 6월 17일 20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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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공포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금세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왜 그럴까? 발 빠르게 도망칠 수 있도록 산소를 듬뿍 담은 혈액이 상체에서 하체로 급속히 이동하기 때문이라 한다.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이라는 속담도 이와 연관된 것이리라. 화가 난 사람은 얼굴이 붉어진다. 혈액 속에 아드레날린이 증가하고 싸움에 대비해서 혈액이 자동적으로 상체로 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가 역류한다는 말도 생겨난 것이리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사람의 얼굴을 말로 서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얼굴 사진을 보여 주면 단박에 알아차린다. 왜 그럴까? 대뇌의 한 부분에 소속된 시각 시스템이 언어 시스템보다 훨씬 더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시각 시스템이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 온 반면 인간이 언어를 취득한지는 얼마 안 되고 따라서 언어 시스템은 대뇌의 더 어린 부분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미술사에서 초상화 장르가 획득한 당당한 지위는 두뇌가 대뇌피질 부위 전체를 얼굴 식별에 바쳐 온 사실과 밀접히 연관된다. 얼굴 식별은 천적 식별이고 그것은 줄행랑 여부의 판단이기도 했다.

헤브라이즘이나 헬레니즘이나 인간을 언어동물로 정의한다. 그러나 흔히 언어 항목만 중시하고 동물 항목은 경시해 온 혐의가 짙다. 인간의 경탄할 만한 능력도 동물적 신체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위의 예증이 잘 보여 준다. 인간의 자부심에 흠집이 되건 말건 인간은 결국 ‘말하는 짐승’이다. 짐승의 국면을 도외시하면 유혈이 낭자한 역사를 설명할 길이 없다.

대선주자에게 폭로공세 한심

인간이 정주해서 농업이나 가축 기르기에 종사한 것은 1만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무리를 이룬 떠돌이 사냥꾼으로 가파른 삶을 꾸려 갔다. 그들에게도 두목이 있었다. 두목은 전제군주나 조폭 두목 같은 폭력적 존재가 아니었다. 사냥의 수확물을 균등하게 분배해서 존경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가령 성탄절 때 요리한 칠면조를 놓고 가장은 흰 살과 검은 살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고 가족에게 물어 보고 떼어 준다. 이런 유럽 쪽의 관습은 옛 사냥꾼 두목 관행의 잔재이다.

인류학자들은 현대인의 심층에도 구석기시대인의 마음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가령 많은 중독자를 거느린 대중문학 장르에 추리소설이 있다. 그리스 고전 비극 ‘오이디푸스 왕’도 줄거리만 보면 추리소설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추리소설의 원형이다. 이 추리소설이 곧 사냥이라는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구석기시대인의 마음을 가진 현대인이 즐기는 ‘사냥’이 곧 추리소설이다.

범죄 수사영화도 결국 범인 ‘사냥’이다. 인간 진화의 역사를 길게 돌아보는 것에는 뚜렷한 이점이 있다. 우리의 현재나 미래를 단기적으로 보지 않고 느긋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도 그 하나다. 또 말하는 짐승인 인간에게 과도한 기대를 갖는 것도 절제시켜 준다. 그렇긴 하지만 근자에 벌어지는 우리네 정치 행태는 민망하기 짝이 없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오래전이지만 ‘껍데기 벗기기’란 가학성 놀이가 있었다. 누군가가 만만한 아이를 찍어 놓고 “껍데기 벗겨라!”고 소리친다. 동패가 일제히 달려들어 손발을 잡아 꼼짝 못하게 하고 아랫도리를 벗겨 창피를 주고 희희낙락한다. 시정잡배들이 술집 색시를 놓고 비슷한 행패를 부려 울리기도 했다. 요즘 정치권에서 대선주자에게 파상적으로 폭로 공세를 가하는 모습을 보면 현대판 ‘껍데기 벗기기’를 보는 것 같아 한심한 생각이 든다.

‘간판 바꾸기’가 정치발전인가

최근의 추리소설에는 금융사범이나 산업스파이가 성형수술로 완전히 얼굴을 바꾸고 변성명한 채 타인 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 권력 쪽에 줄 선 사람들이 새 정당 만든다며 법석을 피우더니 몇 해도 안 돼 빠져 나와 또 새 정당 만든다고 온 동네가 시끄럽다. 성형수술에 변성명하고 활보하는 범법자의 엽기적 행각과 뭐가 다른가? 정말이지 어디가 다른가?

우리 정치는 언제까지 ‘껍데기 벗기기’와 새 정당 만들기와 지역주의에 매달릴 것인가? 새천년민주당을 헌천년민주당으로 만드는 게 정치발전이요 선진화인가? 참으로 곤혹스럽고 헷갈리게 하는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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