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대통령이 진작 영어에 눈떴다면

  • 입력 2007년 4월 11일 19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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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영국이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포클랜드전쟁을 할 때 BBC방송은 영국군을 ‘우리 군’이 아닌, ‘영국군’이라고 표현했다. 마거릿 대처 총리가 화가 나서 시정을 요구했으나 BBC는 “우리 방송은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시청한다. 심지어 아르헨티나 국민도 보는 방송에서 어떻게 ‘우리 군’이라고 할 수 있느냐”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전쟁 상황에서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해도 시원찮을 판에, 더구나 공영방송이 이런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BBC의 시선이 영국을 넘어 이미 세계로 향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결과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고 권위 있는 방송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한다. 지난주 교육방송(EBS) 영어교육 채널 개국 행사에서 “영어를 못해 답답할 때가 있다”면서 “시간이 있으면 저도 이 방송으로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임기 말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시킨 자신감 때문인지 생각이 유연해졌다는 느낌이다. 그의 영어 실력은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법만 알고 말은 못하는’ 수준이다.

노 대통령이 진작 영어에 눈을 떴더라면 어땠을까. 영어 좀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날 영어는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수단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한 편리성을 떠나 생활과 의식에도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얘기다. 세계화와 인터넷의 발달로 영어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개개인의 세계관은 직간접적인 경험이나 지식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까지 들출 필요 없이 최근 외신들을 눈여겨보지 않은 사람은 농사를 도심 한복판의 초고층 빌딩 안에서 1년 내내 지을 수 있고 혈액형 A, B, AB형을 과학적 조작으로 O형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낼 것이다.

일찍이 영어를 잘해 노 대통령의 세계관이 바뀌었다면 국정 운영이나 이 나라의 모습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성난 얼굴’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적었을 것이고, “반미(反美) 좀 하면 어떠냐” “반미로 재미 좀 봤다” “미국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라는 식의 ‘반미 장사’ 화법을 듣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외교안보는 물론이고 교육, 경제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을지 모른다.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은 노 대통령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꼭 영어를 배우라는 얘기가 아니다. 1970, 80년대의 운동권식 시각이나 20세기의 협소한 시각에 머물지 말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 즉 세계관을 확장하라는 것이다. 학자들의 밥벌이용으로나 적합한 좌-우, 보수-진보 구분법에 꿰맞춰 스스로 의식과 행동을 제약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미래의 물결’이라는 신간에서 “2025년 무렵 한국은 11대 강국 중에서도 최대 강국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로의 개방과 창조의 자유 보장 같은, 미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지도자상(像)을 제시해 준 셈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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