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일본 외교의 ‘key man’잡기

  • 입력 2007년 2월 22일 03시 00분


코멘트
1945년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수장으로 일본에 진주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인에게는 전쟁을 치른 적대국의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그의 통치 6년간 일본 국민이 그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50만 통이 넘었다고 한다. 1985년 발간된 ‘맥아더 원수 귀하’라는 책에 나온 얘기다. 그의 통치에 대한 찬양 일색인 이 편지들은 승자 앞에서 낮은 자세로 임하며 실리를 끌어내는 일본식 현실주의를 읽게 한다.

꼭 편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천황제를 포함한 일본식 가치를 지켜 냈다. 반면 같은 시기 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을 겪었다.

일본에서 일하다 보면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엇갈렸던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대해 자주 돌아보게 된다. 그럴 때면 미국을 십분 활용해 실리를 챙겨 온 일본, 우물 안에서 헤매다 실기를 거듭해 온 한국이 대조돼 가슴이 답답해지곤 한다.

역사의 고비에서 양국의 운명이 갈린 차이는 어디서 온 걸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한국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크며 지정학적 전략가치도 높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일본이 ‘광란’의 태평양전쟁 시기를 제외한다면 세계의 움직임을 재빨리 읽고 핵심 역할을 하는 ‘키맨(key man)’들을 총력을 기울여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해 가던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도 대표적 친일파였다. 그는 당시 여러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일본이라면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고 썼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자치가 불가능하다”고 적었다.

루스벨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면에도 일본의 작용이 있었다. 당시 루스벨트의 책꽂이에는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가 쓴 영문판 ‘부시도(武士道)’나 ‘주신구라(忠臣藏)’가 꽂혀 있었다. 그의 하버드대 동창이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 자작은 틈날 때마다 백악관을 방문해 우정을 이어 갔고 스포츠광인 루스벨트를 위해 유도를 가르칠 선수를 일본에서 데려갈 정도로 온갖 정성을 쏟았다.

고종은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철석같이 믿고 한일병합 과정에서 수차례 루스벨트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이 조선을 편들 리는 만무했다.

최근 나온 리처드 아미티지의 2차 보고서를 보면 새삼 한미일 3국 사이에 얽힌 근세사가 떠오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 최대 동맹국가로 지목하고 무기 수출 확대 등 재군비를 독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1차 보고서 때와 마찬가지다. 반면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중국과 같은 줄에 서 있는” 나라로 묘사돼 있다.

물론 이 보고서는 미국의 최대 경쟁국인 중국에 대한 미국적 시각과 이해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일본도 미국과의 동맹을 기조로 중국을 상대하는 게 국익에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일본은 친미 외교를 통해 자신들의 실리를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고마워하며’ 받아들이도록 한 셈이다. 아사히신문은 이에 대해 “미국 내 지일파가 총동원돼 지혜를 짜내 일본을 배려했다”고 분석했다.

‘중국에 편향되는 게 한국에 유리하지 않다’, ‘한미동맹은 굳건히 유지해 나가야 할 가치’라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도 인정하는 ‘자명한 공식’이다. 문제는 한국은 어떤 노력을 했느냐는 것이다. 가령 누가 뭐래도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기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일 수밖에 없는 미국에서 한국의 이해관계를 잘 알고 한국을 대변해 줄 수 있는 ‘키맨’을 키우고 있는가.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