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라디오 스타’와 ‘7080’

  • 입력 2006년 11월 1일 21시 00분


코멘트
연평균 100편가량 영화를 본다. 주말에 두세 편을 몰아 보거나 평일 마지막 회를 즐긴다. 영화 담당 기자를 몇 년간 하긴 했지만, 늘 팬의 자리에서 영화를 보려고 애쓴다. 그런 점에서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로 최근 본 ‘라디오 스타’를 꼽고 싶다. ‘왕의 남자’ ‘괴물’ ‘타짜’ 등 올해의 흥행작들이 ‘웰메이드(well-made)’ 영화라면 ‘라디오 스타’는 ‘웰빙(well-being)’ 영화일 것이다. 참 ‘착하고 푸근한’ 영화여서 올해 들어 유일하게 두 번 봤다. 세상에는 승자보다 패자의 느낌을 갖고 사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됐고, 영화의 무대인 영월에 가서 영화 속 스튜디오 천문대 다방 순댓국집 등을 둘러보고 싶어졌다.

영화는 ‘88년 가수왕’이지만 이제는 한물간 철딱서니 없는 로커와 20년간 그를 따라다닌 사람 좋은 매니저의 이야기다. 로커는 흐르는 세월에다 음주운전, 폭행, 대마초 사건으로 팬들에게 잊혀져 미사리 카페를 전전하다 오지인 강원 영월 방송지국의 라디오 DJ로 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한 채 구식 벤츠를 타고 다니며 잘나가는 후배들을 들먹거린다. ‘형’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몸종’이나 다름없는 매니저는 담배를 사 오고 불을 붙여 주며 자장면도 비벼 주지만 싸가지 없는 ‘가수왕’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잊혀져 가는 매체와 사라져 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하지만 라디오가 TV에 밀려 사라지지 않았듯, ‘가수왕’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그의 투박한 진행과 영월 사람들의 일상에서 퍼 올린 사연이 전파를 타면서 순식간에 인기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 어머니를 그리는 다방 레지, 집 나간 아버지를 찾는 순댓국집 아이, 농협 여직원을 사모하는 꽃집 청년, 고스톱 규칙을 따져 묻는 경로당 할머니들의 육성이 가감 없이 전해지면서 스크린 안팎이 눈물과 웃음으로 뒤범벅된다.

가수에 박중훈, 매니저로 안성기를 캐스팅한 것은 이준익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안성기는 뛰어난 코믹 배우다. 그는 진지한 배역보다 ‘바람 불어 좋은 날’ ‘투캅스’ 같은 영화의 코믹 연기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박중훈은 역시 영리한 배우다. 그는 정승혜 프로듀서가 내민 한 장짜리 시놉시스를 단박에 자신의 영화로 받아들였고, 특유의 캐릭터로 활기를 불어넣었다. 방송 사고 후 영월로 전출된 깐깐한 PD 역의 최정윤을 발견한 것도 수확이다. 조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와 대사, 그룹 노브레인(이스트 리버)의 열연과 열창, 주제곡 ‘비와 당신’을 비롯한 삽입곡들도 맛깔스럽다.

‘가수왕’은 한 시절을 풍미했으나 이 정부 들어 싸가지 없다는 소리도 듣는 일부 잘나가는 ‘80학번’, 매니저는 열심히 살았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정과 사회에서 붕 떠 버린 ‘70학번’의 모습이 겹쳐진다. 매니저는 지방에서의 인기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가수왕’을 위해 핑계를 대고 그의 곁을 떠난다. 뒤늦게 사연을 알게 된 ‘가수왕’은 전국으로 송출되는 방송에서 “형 듣고 있어? 천문대에서 별 볼 때 형이 그랬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고. 와서 좀 비춰 주라”고 울먹인다.

그렇다. 인생은 누군가의 희생과 도움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버스 안에서 김밥을 꾸역꾸역 삼키며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안성기의 표정 연기와 두 배우가 펼치는 빗속의 라스트 신은 한국 영화의 명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성공과 좌절을 맛보았으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세대, 매사 자신보다 남을 위해 헌신한 ‘내 누이 같은’ 세대에게 바쳐진 영화라는 점에서 ‘라디오 스타’는 이 시대 모든 ‘7080’에게 헌정된 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