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평화는 군사력이 만든다

  • 입력 2006년 10월 15일 20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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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북부의 소도시 마이놋에는 공군 미사일기지가 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지구상의 어떤 목표에도 미사일을 쏘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이라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암호명령을 내리면 몇 분 안에 북한도 때릴 수 있다. 여기에는 B-52 중(重)폭격기로 구성된 폭격비행단도 있다. 전 세계의 전략목표를 24시간 내에 폭격할 수 있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상징하는 기지 중의 하나다.

1차 북한 핵 위기 때인 1994년 6월 필자는 이곳의 깊숙한 곳까지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미국 여론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공격해 핵개발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강경론이 우세하던 시기였다. 그때 만난 전직 외교관, 퇴역 장성, 학자 등의 관심사는 온통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이었다. 질문의 대부분이 “한국은 전쟁을 불사할 각오가 돼 있는가”였다. 전쟁도 불사하려는 미국의 힘이 부러웠다. 스스로의 힘으로 북한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다행히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중재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김 주석의 사망으로 무산됨) 일정이 잡히면서 위기는 일단락됐다.

12년이 흐른 지금은 우리에게 훨씬 가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 한다. 전 세계를 향해 ‘핵실험 성공’을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뉴욕 하늘 아래에서 “축하해 줘야 할 일 아니냐”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속이 뒤집히지만 우리가 군사적으로 맞대응할 수 있는 힘은 없다. 12년 전보다 사정은 더 나빠졌다. 2008년까지 주한미군 1만2500명 감축, 2009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한미연합사 해체…. 반세기를 넘긴 한미 군사 혈맹(血盟)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펑펑 울어도 시원찮을 판이다. 그런데 현 정권은 핵무기를 가진 북한에 대고 햇볕을 쬔다, 포용을 한다고 계속 잠꼬대하고 있다. 미국의 부시 정권이 그런다면 몰라도….

김정일의 비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이 얼마나 기막힌 역설인가.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은 군사적 강자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다. 주한미군 및 유사시 증원군 전력과 한미 연합 작전통제체계, 미국의 핵우산에 공백이 생긴다면 우리 운명은 김정일에게 달리게 된다. ‘자주 국방’ ‘주권 회복’ 같은 미사여구는 군사력의 뒷받침 없이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무책임한 정치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 예방을 위한 억지력을 구축하는 게 책임 있는 정부의 첫 번째 할 일이다.

화학·생물학전 무기에도 우리는 거의 무방비 상태다. 북한이 간첩을 시켜 서울시내 지하철역 몇 군데에 독가스를 풀었다고 해 보자. 서울은 일순간에 대공황에 빠질 것이다. 핵무기까지 가진 북한은 더욱 무분별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커졌다. 절대 강자인 미국조차 이제 북한을 다루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5월 미 국방대 연설에서 1990년대 초 사담 후세인이 핵무장에 성공했더라면 이라크에 대한 1차 공격(‘사막의 폭풍’ 작전)이 불가능했을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서독의 독일 통일, 북예멘의 남예멘 흡수통일은 경제력 외에 2, 3배 높은 군사력 덕분에 가능했다. 신라와 고려의 3국 통일도 마찬가지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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