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노정권의 눈에 씌인 콩깍지

  • 입력 2006년 9월 10일 15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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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 각계에선 반성의 소리가 많았다. 사후 약방문 격이지만 대책도 수없이 나왔다. 그중 핵심은 왜 위기가 코앞에 닥치도록 몰랐는가 하는 점이었다. 정부와 학계 그리고 언론계도 미리 경보를 내지 못한 데 대해 반성했고 정부는 국제금융 위기를 경고한답시고 국제금융센터라는 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 경보가 없었다는 말은 사실과 달랐다.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말은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위기의 징후가 나타났고 경보도 나왔지만 철저하게 무시됐다. 선진국 클럽에 가입했다는 자기도취감에 빠져 있던 정권의 실세들이 중대 경고를 아예 외면한 것이다. 전문가 집단인 경제 관료들마저 차기 정권의 향배에 온통 정신이 팔려 경고음을 듣지 못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기 반년 전에 이미 위기는 가시권에 있었다. 태국의 통화위기가 아시아로 확산되고 있었지만 정부의 관심 밖이었다. 머지않아 영국을 따돌리고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 된다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에 바빴다. 위기 경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오만이 바로 위기의 전조였다.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위기 경보가 더 자주 울렸다. 경제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에 ‘태풍급’ 경보가 빈번했지만 접수가 거부됐고 심지어는 적대시되는 지경이었다. 집권 초기에는 비판 언론을 포함한 언론인들의 고언(苦言)을 ‘고의적인 비난’이라고 외면하더니 아예 경보 시스템을 꺼 버려 이젠 망가져 버린 듯하다. 그러니 “도둑맞으려니까 개도 안 짖는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권 말기가 되면 집권세력의 눈에는 콩깍지가 씌어진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경제는 좋았으면’ 하는 욕망이 “경제는 좋은데 민생은 어렵다”로 바뀌고 ‘권력형 게이트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권력형 게이트는 아니다”는 결론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을 위기에서 구해 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이끈 잭 웰치는 위기관리를 진화(鎭火) 작업에 비유했다. 대형 위기가 터지면 관리자들은 사태 파악을 위해 회의만 거듭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사무실 여기저기에 모여 수군대다 보면 실제 업무는 마비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바다이야기’ 파문에 휩싸인 노무현 정부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지금 현 정권은 최악의 민생경제, 지방선거 패배, 바다이야기 등 잇단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조직’이라고 할 만한 386 정치인과 ‘탄돌이’마저 비판세력으로 바뀔 정도다. 이런 판국이라 당면한 정권 위기의 돌파가 최대 관심사가 될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권의 위기보다 나라의 위기가 더 심각하다. 안보 위기와 경제 불안이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소비 위축, 투자 부진, 생산 위축에 빠진 경제 상황이 안보 위기로 더욱 악화될까 걱정이다. 작년 말 한국은행이 160억 달러 흑자로 전망했던 올해 경상수지는 적자로 반전될 처지가 됐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경기 전망이 더 우울하다. 불과 4년 만에 인도 브라질에 밀려 아시아의 주변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위기를 맞은 리더에 대한 웰치의 조언은 이렇다. 첫째, 문제가 보이는 것보다 심각하다고 생각하라. 둘째,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셋째, 위기일수록 조심해야 할 비평 세력은 언론이 아니라 당신의 조직일 수 있다. 넷째, 프로세스와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라. 마지막으로 위기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라.

노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남은 1년 반 동안 정권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나라를 구하고자 할 것인지 궁금하다. 정권만을 구하려다 둘 다 놓치고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대통령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고장 난 위기 경보 시스템부터 고쳐야겠다.

박영균 편집국 부국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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