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승헌]KDI 설문조사도 ‘코드맞추기’ 하나

  • 입력 2006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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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발연구원(KDI)은 경제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국책 연구기관이다.

다른 국책 연구소에 비하면 자율성이 강하고 때로 정부 정책의 문제점도 날카롭게 지적하곤 했다. 신뢰도도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이런 KDI가 ‘황당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지난달 KDI는 ‘경기 진단에 대한 경제전문가 인식 조사’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대상은 교수, 기업인 등 경제 전문가 200여 명이었다.

이 조사에는 ‘경제 관련 언론보도에 대한 인식’이란 이색적 항목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곳곳에 ‘함정’이 숨어 있다. 언론이 실제보다 경기를 더 비관적으로 봐서 문제라는 식의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언론 관련 항목은 5개의 설문으로 구성돼 있다. △현 경기 상황에 대한 언론의 보도에 대한 평가 △언론이 정부보다 경기 전망에 대해 비관적인 이유 △언론의 경기 상황 보도에 대한 평가 △경기 관련 기사의 가장 큰 문제점 △어느 매체를 통해 경기 관련 기사를 취득하느냐 등이다. 군데군데 언론에 대한 왜곡된 불신감이 배어 있다.

설문에 대한 답변 항목도 문제다. 경기 관련 기사의 문제점을 물은 뒤 △통계의 오류 △기자의 전문성 부족 △출입처 중심의 기사 △광고주의 지나친 영향력 △심층 탐사보도 미흡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 △기타 중 하나를 고르라는 식이다.

언론의 경기 전망이 정부보다 비관적인 이유에 대한 답변 항목으로 ‘현 정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넣기도 했다. 설문지를 받은 상당수 전문가는 “너무 속이 보여 응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고 전했다.

KDI 측은 “언론 보도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기 위한 설문조사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 정부 출범 후 3년 반 동안 경제는 내내 죽을 쑤었다. 정부의 ‘장밋빛 전망’이 들어맞은 적은 거의 없다.

KDI가 예산이나 인사 등에서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국책기관이란 한계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코드 맞추기’로는 그동안 쌓은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릴 뿐이다. KDI는 이번 논란에 대해 분명히 해명해야 한다.

이승헌 경제부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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