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노무현과 가필드

  • 입력 2006년 8월 25일 20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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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오하이오·공화당)는 취임한 지 3개월 만인 1881년 7월 2일 등에 두 발의 총탄을 맞고 80일 만에 세상을 뜬다.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찰스 기토라는 남자가 보상으로 외교관 자리를 요구했으나 거절한 것이 화근이었다. 실망한 기토는 볼티모어 역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가필드를 향해 권총을 쏜다.

아까운 죽음이었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근면과 성실함으로 대통령이 된 가필드는 링컨보다 더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독학으로 대학교수가 됐고 주 상원의원,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50세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가 비명에 가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공직사회는 좀 더 일찍 개혁됐을 것이라고들 한다. 엽관제의 뿌리가 얼마나 질긴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선거 때 도와준 사람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최루탄 가스를 마셔 가며 동고동락한 사이라면 더욱 그렇다. 김대중 정권 때의 실세 K 씨는 사람을 추천할 때 “8·15광복 전에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느냐, 광복 후에 불렀느냐를 보고 결정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정권 잡기 전부터 우리 편이었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는 얘기다.

노무현 정권에선 이런 기준이 극도로 강화되고 집착의 강도도 세졌다. ‘코드’가 맞지 않으면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안 된다.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는 코드만 가지고도 부족한 듯하다. 같은 편임을 증명할 수 있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당선 가능성이 낮은 선거에 나가서 떨어지거나, 주류 사회에 대한 공격으로 화제를 낳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5·31지방선거 때 대구시장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이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에 기용된 것이나, 대통령 주변의 젊은 참모들이 주류 언론에 대한 언어폭력으로 소동을 피워 입신(立身)에 성공한 것이 그런 예이다. 이 정권 들어 언론과 싸워서 인생이 안 풀린 사람이 없다. 무능이 코드에 가리는 바람에 출세한 자격 미달자도 많다.

정치 발전이란 엽관제의 폐단을 줄여 가는 것인데 이 정권은 거꾸로다. 여론 눈치 안 보고 마구 밀어붙인다. 아예 ‘배 째라’는 식이다. 비판이라도 하려 하면 “인사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선거에서 상대방보다 50만여 표쯤 더 얻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공적(公的) 자리를 좌지우지하라는 권한까지 국민이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국민주권(國民主權)의 헌법 정신이나 정치문화와도 맞지 않는다.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여전히 이중적이다. 일면 민주적 지도자이면서, 일면 덕(德)이 있는 가부장적 지도자이기를 바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물난리만 나도 최고통치자의 부덕(不德)부터 떠올린다. 이런 정치문화 속에서 “대통령 책임제는 기본적으로 승자독식(勝者獨食) 체제”라고 말해 봤자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은 “그러니까 제도의 한계를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극복해 달라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노 대통령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것도 가장 민감한 부문인 인사에서. 국민의 실망이 쌓여 지지율이 떨어졌고, 대통령은 그럴수록 코드가 맞는 사람만을 골라 썼다. 그것이 결국 오늘의 총체적 실정(失政)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정권은 인사의 공정성을 높이고 검증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를 도입했다고 자랑했다. 청와대에 인사수석비서관직을 신설했으며, 공기업 사장 추천위원회 제도까지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잡음 없이 넘어간 경우가 거의 없다.

인사의 코드화, 곧 ‘신판 엽관제’는 우리가 그동안 힘들게 쌓아 올렸던 업적주의, 실적주의의 전통을 일거에 허물어뜨릴 수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능력과 실적에 따라 대접받는 업적주의는 근대성(近代性)의 본질이다. 업적주의가 무너지면 사회의 공동선을 떠받치는 도덕적 정신적 인프라가 주저앉아 버린다. 정치권력의 향배와 코드, 그리고 선거에서의 기여도에 따라 내 자리, 내 사업의 성패가 결정된다면 누가 한눈팔지 않고 땀 흘려 일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누가 차기 대권을 잡을 것인가에만 쏠려 있다. 이대로 가면 지금보다 더 심한 엽관제가 판을 치게 생겼다. 그러기 전에 업적주의의 기틀을 다져 놓아야 한다. 남은 임기 1년 반, 이것 하나만이라도 지켜야 한다. 노 대통령부터 가필드에게서 보고 느껴야 한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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