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힐(Hill)이 남긴 미스터리

  • 입력 2006년 7월 12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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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이 남기고 간 미스터리가 영 풀리지 않는다.

7일 밤 ‘미사일 특사’로 서울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9일 오후 다음 방문지인 도쿄(東京)로 떠나기 전에 ‘두 장의 비행기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고 했다. 혹시 노무현 대통령을 면담하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9일 오후 서울 정동 미 대사관저에서 힐 차관보를 인터뷰한 직후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힐 차관보가 직접 한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에 그런 저간의 사정을 들려준 사람은 매우 믿을 만한 미국 측 취재원이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힐 차관보는 서울 도착 다음 날 6자회담 한국 측 파트너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꽤 긴 시간 대화를 나눴고, 떠나던 날 오전엔 송민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이종석 통일부 장관을 이미 만난 터였다. 더구나 송 실장과는 서로 “민순” “크리스”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폴란드 주재 대사를 지냈고, 6자회담 수석대표도 함께 맡았다. 미국이 하고 싶은 얘기를 전할 통로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힐 차관보는 여분의 비행기 좌석까지 마련해 놓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노 대통령과의 면담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 관리지만 차관보가 한국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격외(格外)의 사건’이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현 정부 외교안보 라인의 핵심 실세들을 모두 만났지만, 뭔가 매우 답답한 심정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힐 차관보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한 말(10일자 동아일보 A1·3면)을 다시 들여다봤다. “모든 문명국가(every civilized country)는 북한의 이번 미사일 발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책임이 있다…. 북한이 6자회담을 보이콧하고 미사일을 쏘는 마당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business as usual) 행동할 수는 없다.”

그는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 어떤 논리로 일부 ‘안보독재 시대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언론을 몰아붙이고 있는지 속속들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모든 문명국가의 책임’이라고까지 한 것은 한마디로 더는 노무현 정부의 ‘궤변’을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직접 인터뷰를 정리한 후배 기자는 “힐 차관보가 여러 차례 그 말을 강조하더라”고 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이야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날 아침 대통령홍보수석실은 “굳이 일본처럼 새벽부터 야단법석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힐 차관보의 ‘비행기표 두 장’에 담긴 메시지는 이것뿐일까?

혹시 노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건 아닐까. “It's Kim Jong-il, stupid!(이 바보야, 문제는 북한이야!)” 피아(彼我)를 좀 잘 구분하라고…. 지금은 미국이나 일본과 싸울 때가 아니라고…. 6자회담은 5개국이 한목소리로 북한을 설득하는 5 대 1의 구도로 가야지,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한편이 되고 미국과 일본만 남는 4 대 2가 돼선 안 된다고….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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