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대입 수험생이 덮어 버린 역사 교과서

  • 입력 2006년 6월 25일 19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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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지인의 딸인 A 양은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입시에 중압감을 느낄 때면 ‘지금 자지 않고 1시간 더 공부하면 장래 남편감이 바뀐다’는 농담을 친구들과 나누며 수다로 스트레스를 푼다. 다행히 낙천적인 편이어서 그나마 부모는 가슴을 덜 졸인다.

그런 A 양이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사회탐구 과목으로 평소 공부해 온 ‘한국 근현대사’ 대신 다른 과목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얘가 무슨 소릴? 그동안 공부한 건 어떡하고?” 깜짝 놀라 “성적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던 부모는 뜻밖의 설명에 말문이 막혔다. “한국 근현대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답답해요. 왜 우리는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는지….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다른 과목을 선택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성적만 신경을 썼지 무슨 교과서로 뭘 공부하는지 몰랐던 부모는 딸이 왜 우리 역사에 대해 그토록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들춰 보았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左)편향 내용으로 논란이 된 모 출판사 것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달 한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이 이 책의 시각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주의 역사서와 놀랄 만큼 같다”고 한 지적이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월드컵 때문에 모두가 조국에 자부심을 느꼈을 때 거꾸로 열패감(劣敗感)에 고민했을 딸이 안쓰러웠다.

회사원인 A 양의 아빠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한국적 민주주의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유신(維新)교육을 받고 자랐다. 대학시절 이념서적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 역사가 ‘실패한 역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굴곡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졌다. 해외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한국만 한 나라도 많지 않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나은 세상을 살고 있는 딸이 대한민국에 긍지를 느끼지 못해서야….

그는 다른 아이들도 그런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는 딸이 유별난 게 아님을 알게 됐다. 역시 교과서엔 문제가 있었다. 신문에서 보았던 편향된 역사교육의 피해자가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했다.

학생들에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지식을 가르치고 건전한 인성과 국가관 등을 함양토록 하는 것이 공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여기엔 ‘내가 살아갈 나라’에 대한 자부심 고취가 필수적이다. 대한민국은 잘못 수립됐다며, 그런 조국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면 아이들부터 공감하겠는가. 국제여론조사지(IJPOR) 봄호에 실린 ‘민족 자부심 국가비교’ 논문에서 한국인의 민족적 자부심이 조사대상 33개 국 중 22위에 그친 것도 이런 교육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중사관이 식민사관 못지않게 자학(自虐)의 눈길로 한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아이러니다. 사실(史實) 해석에 특정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고, 이념적으로 편향된 교육을 해서 뭘 얻겠다는 것인가. 세계화 시대에도 교육은 ‘당당한 한국인’을 키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A 양이 대학 진학 후로 미뤄 놓은 일은 손가락으로 꼽기 어렵다. 밀린 책 읽기, 배낭여행, 남자친구 사귀기, 다이어트…. 여기에 ‘우리 역사 바로 알기’가 추가돼야 할 것 같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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