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경미]수학을 위한 변명

  • 입력 2006년 6월 6일 22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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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논설위원으로 칼럼을 쓰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주제는 수학의 중요성이었다. 필자의 본업이 관련되지 않는다면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수학에 대한 글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밥그릇’과 관련된 목소리를 낸다는 부담 때문에 미뤄 오다가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수학의 중요성을 얘기해 보고자 한다. 용기까지 내야 하는 이유는 수학에 대한 일반인의 반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수학을 배웠지만 인생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푸념과 수학에 투자했던 그 많은 시간을 다른 분야에 쏟았다면 삶이 더 윤택해졌을 것이라는 수학무용론을 숱하게 들어 왔다. 살아가는 데 직접 소용되는 수학적 지식은 사칙연산과 간단한 통계뿐일지 모른다. 그러나 수학은 유용성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여주인공은 사인과 코사인을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이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 남주인공은 체계적인 사고방식을 익히기 위해 필요하다고 답한다. 수학을 배우는 이유는 수학의 구체적인 ‘내용’을 활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배우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신능력’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수학 학습을 통해 연마되는 논리적 연역적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 추상화 형식화 기호화 단순화 일반화 능력은 다른 분야를 공부하거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기반이 된다.

수학의 증명은 처음에 약속한 정의나 공리, 그리고 이미 증명한 성질에 기초하여 철저하게 연역적으로 이루어지며, 편리를 위해 필요한 성질을 임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학생들은 증명을 배우면서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편법을 허용하지 않는 엄정하고 올곧은 품성을 기를 수 있다.

최근 개봉된 영화 ‘다빈치 코드’에는 피보나치수열이 나온다. 수학은 이처럼 이야기의 직접적인 소재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원작자 댄 브라운이 복잡하게 얽힌 복선을 정교하게 구조화하며 소설을 쓸 때에는 수학을 통해 길러진 사고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소설의 얼개와 디테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수학이 간접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교육과정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과 내용의 전반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틀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교육과정 개정작업에서 수학과 같이 쓸모없어 보이는 고전적인 교과와 기술·가정과 같이 실용적인 교과의 비중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곤 한다. 교육과정은 한 과목의 시간 수가 많아지면 다른 과목의 시간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제로섬’이다.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만족과 효용을 주는 교과를 강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역설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교과는 학교가 아니면 평생 공부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실용적인 지식은 살아가면서 필요와 흥미에 따라 그때그때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이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수학을 현실에서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학이 영혼을 진리와 빛으로 이끌어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라고 갈파했다. 최근 대학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실사구시형의 직업 맞춤교육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각 직업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과 지식은 다양하고 또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요구 하나하나에 부응하기보다는 폭넓은 교양교육을 통해 졸업 후 그런 능력을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기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얼마 전 내한한 흑인 여성 최초의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인 브라운대의 루스 시먼스는 취임사에서 “대학은 직업을 마련해 주는 곳이라기보다는 영혼의 성장을 위하여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대학교육을 직업교육과 차별화하고 그 품격을 높여 주는 것은 수학과 같은 기초학문이다.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수학이 자연과학과 공학, 경제학과 금융, 더 나아가 예술이나 인문과학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정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학의 힘 때문이다. 최근 중국과 인도의 급부상을 의식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수학·과학 교육의 강화를 천명하고 나섰다. 인간 사고(思考)의 기초를 키워 주는 수학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적인 경향이다.

박경미 객원논설위원·홍익대 교수·수학교육 kpark@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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