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강규형]석학 갤브레이스가 남긴 유산

  • 입력 2006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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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얼마 전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캐나다의 농촌에서 태어나 한 시대의 통치철학을 세워놓고 간 그는 2m가 넘는 그의 키만큼이나 큰 족적을 남긴 20세기의 거인이었다. 그가 1958년에 쓴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는 훗날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가난과의 전쟁’, 그리고 린든 존슨 행정부의 ‘위대한 사회’의 기본 철학을 닦은 역저로 평가된다. 아마도 한 권의 책이 한 시대에 영향을 미친 정도로는 갤브레이스 자신이 큰 영향을 받았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과 같은 책들을 제외하고는 이 책을 능가할 만한 경우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그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있었다. 필자가 공부하던 박사과정에 1년 내내 현대사 각 분야의 거인들을 초청해서 1주간 집중적인 세미나를 하며 각 이슈를 탐구하며 토론하는 독특한 과정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조지 케넌, 아서 슐레진저 2세, 스티븐 제이 굴드, 폴 케네디와 같은 각 분야의 석학이나 중요인물들을 만나 공부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갤브레이스 교수였다.

그는 풍부한 유머와 문필력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인간을 착취한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그 반대이다”라는 그의 말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세미나실에 들어온 그는 그만큼 키가 큰 체스터 패치라는 젊은 미국외교사 담당 교수와 악수하며 이렇게 농담을 했다. “나와 비슷한 사이즈의 학자를 만나 반갑습니다.” 패치 교수는 이렇게 답변했다. “단지 신체적인 사이즈뿐만 아니라 지적인 사이즈도 비슷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순간 세미나실이 웃음바다가 됐던 기억이 생생하다.

갤브레이스는 평생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공(公共)’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역설했다. 그는 시장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기업지배구조의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대신 선한 의도를 가진 큰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는 온정적 진보주의의 입장을 평생 견지했다. 또한 자본주의사회의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는 공공선의 증진보다는 개인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간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가 내세운 해법은 높은 세금과 큰 정부, 정부의 개입, 그리고 사회복지 강화라는 전형적인 진보의 어젠다였고, 그의 생각은 케네디-존슨 시절에 현실화됐다.

이러한 정책은 이 시기 사회갈등의 홍역을 앓던 미국의 사회통합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결국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물론 갤브레이스가 반대했던 베트남전쟁 개입 때문에 이 정책이 실패한 측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증세와 정부보조를 위주로 하는 법안을 하루에도 몇 건씩 통과시키며 ‘위대한 사회’를 추구하고 ‘위대한 대통령’을 꿈꾸던 존슨과 그의 행정부의 ‘진보주의’가 갖는 근본적 한계가 이러한 실패를 가져왔다.

그날 세미나에서도 그는 ‘선한 정부’의 개입을 격정적으로 강조했으며 심지어 소위 ‘진보’의 어젠다가 갖는 맹점을 치유하려 한 로널드 레이건의 통치기간을 ‘광기의 시대(the age of insanity)’라고까지 표현했다. 필자의 옆에 앉은 그 세미나의 주관자이자 냉전사의 석학인 존 루이스 개디스 교수는 이렇게 탄식했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주장을 한 치도 수정하지 않는 그의 일관성이 놀라울 뿐이다!”

그는 선량한 도덕론자였고 빼어난 지성인이었다. 무절제한 성장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절제된 사회와 공공선을 지향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곱씹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고 그의 철학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었고 변한 시대정신을 따라가지 못한 측면도 있다. 사실 갤브레이스가 옹호했던 증세, 누진세 강화, 국가 개입, 정부에의 의존, 분배 중심 정책은 적정한도를 넘어서게 되면 그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한 정부는 결국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다. 이러한 정책이 도를 넘어서게 되면 결국 도와주려 하는 대상인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난, 불평등, 저질 교육과 같은 사회문제를 악화시키며,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야기하고, 도덕과 자율성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갤브레이스 자신도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일 것이다. 만약 한국사회가 정부 개입과 증세로 제반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가 남긴 유산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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