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DJ의 어두운 그림자

  • 입력 2006년 4월 2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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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4층의 신문박물관에서는 요즘 작은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게재불가’라는 전시회다. 엄혹하고 암울했던 1970, 80년대에 군부정권이 신문에 가했던 폭압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계엄사령부 보도검열단이 이 기사는 넣고 이건 빼라, 이 기사는 키우고 이건 줄이라고 붉은 글씨와 검은 글씨로 마구 칼질해 댄 신문 대장(臺狀)을 보고 있노라면 굴욕감을 느끼며 신문을 만들었을 선배들의 참담함이 그대로 전해 온다.

기획전의 성격이 그렇다 보니, 전시되어 있는 사진은 하나같이 어둡다. 긴급조치, 10·26사태와 12·12쿠데타, 5·18민주화운동, 대학가 데모 등등. 그러나 유독 ‘밝은’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 1980년 2월 ‘서울의 봄’ 때 김영삼 김대중 씨가 만나 악수하고 있는 사진이다. 50대 초반의 두 사람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물론 이 사진도 ‘게재불가’ 판정을 받아 신문에는 실리지 못했다. 신군부는 두 정치인이 부각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로부터 26년, 사진 속의 두 사람은 그토록 원하던 대통령을 지내고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YS와 DJ의 ‘요즘’은 같지 않다. DJ는 여전히 뉴스메이커다. 대통령에서 물러났는데도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제 국민행동본부는 ‘김대중 방북 저지 및 6·15선언 폐기 촉구’ 강연회를 열었다. 우익단체이긴 하지만 DJ가 자신의 최고 치적으로 자랑하는 6·15남북공동선언이나 재방북 의사가 국민 일각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자인 이장춘 전 대사는 “DJ의 햇볕정권이 참여정부의 촛불정권으로 이어졌다”며 “두 정권이 대한민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추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사로 나선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얼마 전 타계한 신상옥 감독이 DJ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기 직전, 월간조선 2003년 3월호에 기고한 편지를 소개했다. 신 감독의 편지 제목은 ‘노벨상을 위해 민족을 판 당신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조 씨는 “평소 신 씨는 DJ가 김정일 정권을 살려줌으로써, 북한 동포의 고통을 연장시켰다고 비판했다”고 전했다.

강연회에 참석했던 상당수 사람은 조 씨가 최근에 펴낸 ‘김대중의 정체’라는 책을 사서 돌아갔다. 이 책은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DJ를 둘러싼 각종 의혹의 실마리를 풀어 줄 충실한 자료집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은 DJ의 사상편력, 그가 주창한 남북연합제의 본질, 북한정권의 DJ에 대한 시각, 6·15남북공동선언의 문제점, 대통령 재직시에 논란을 빚은 대북정책 등을 비판적 시각에서 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대통령직을 마치고 떠난 인물에 대해 이런 책이 나오고 팔리는 것은 불행하다. 전직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DJ 스스로가 자신과 겹쳐진 어두운 그림자를 깨끗하게 지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DJ는 재방북 욕심을 거둬야 한다. 그는 5·31지방선거가 끝난 뒤 경의선을 타고 북한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북한은 절대로 ‘맨손’의 DJ를 무임승차시키지 않을 것이다. 조 씨는 “DJ가 북한에 가고 못 가고는 DJ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이 결정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재방북을 고집한다면, 이는 정부 측에 뭔가 북한에 줄 선물을 만들어 내라는 압력과도 같다. 누구도 DJ에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북한에 가달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다. 그도 이제 새 일을 만들기보다 정리해야 할 때다.

마침 그는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국민의 정부’ 시절의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을 만나 자료 수집을 요청했다고 한다. 자화자찬으로 가득 찬 자서전은 의미가 없다. 아직도 국민이 갖고 있는 의문을 겸허히 수용하고, 잘못이 있다면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그게 원하는 걸 모두 얻은 정치인에게 남은 마지막 소명이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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