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해]공기업 감사는 ‘전리품’

  • 입력 2006년 4월 11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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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차대조표도 볼 줄 모르는 사람이 공기업 감사(監事) 자리에 앉아 있다.”

전윤철 감사원장이 기획예산처의 장관으로 있을 때인 2001년 3월.

김대중 정부의 구조개혁 작업 가운데 가장 성과가 더딘 공기업 개혁 문제를 놓고 그가 쓴소리를 했다.

예산처 장관이 아무리 공기업 구조조정을 외쳐 봐야 정치권 인사가 공기업 임원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는 한 공공부문 개혁은 ‘공염불(空念佛)’이라는 하소연이었다.

그 후 5년이 흘렀다.

그의 고언(苦言)에도 불구하고 공기업 감사 자리는 여전히 정치권의 전리품(戰利品)쯤으로 취급받고 있다.

한나라당 공공부문개혁특별위원회(위원장 안경률 의원)는 최근 293개 정부 산하기관에서 ‘낙하산 인사’로 꼽을 만한 사례로 공기업 임원 282명(정치인 출신 134명, 관료 출신 14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 가운데 정치권 출신으로 공기업 감사로 내려간 사람은 모두 60명. 기관장이나 상임이사로 간 경우도 각각 54명과 20명에 이른다.

산업자원부 산하의 대표적인 정부 출자기관인 D공사의 사장은 여당 조직을 총괄하던 간부 출신이다. 또 이 회사 감사는 2003년 대통령비서관을 지냈다.

국가보훈처가 주무부처인 H공단의 이사장은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후보였으나 낙선한 사람이고, 감사 역시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한때 노무현 후보 특보를 맡았던 정치권 출신이다.

2004년 17대 총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해 고배(苦杯)를 마시고 공기업 감사 자리로 들어온 인사도 7명이나 된다.

이 밖에도 2002년 대선 때 노 후보 특보를 맡았거나 열린우리당과 청와대에 근무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공기업 임원 명단에 적잖이 올라 있다.

청와대는 “과거 정부와 달리 ‘낙하산 인사’는 없다”고 강조한다.

무조건 내려 보내는 게 아니라 경력과 전공, 학력, 전문성 등을 모두 감안해 시스템으로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한 여권 인사는 “과거 정부에 비하면 지금은 낙하산이 절반도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전공이나 경력 등 전문성과는 무관하게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에 있다.

공기업이 ‘낙하산 인사’로 멍들고 있을 때 민간 기업들은 감사 한 사람의 독단을 막기 위해 감사위원회라는 협의체를 만드는 등 지배 구조를 뜯어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민간기업이든 공기업이든 감사가 입을 닫으면 회사 내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파악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회계장부가 분칠이 돼 있어도 감사가 묵인한다면 밖에서 발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5·31지방선거가 끝나면 낙선한 정치권 인사들이 또다시 공기업을 기웃거리는 ‘낙하산 부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는 “공신에게 녹(祿)은 내리되 직(職)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벼슬을 주지 말고 유능한 사람을 앉히라는 것이다.

5년 전 공기업 낙하산 인사를 질타한 전 감사원장이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최영해 경제부 차장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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