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외환위기가 닥쳤다. 세계화의 영향이다, 잘못된 경제정책과 배타적 정치 탓이다, 빈곤과 환경을 외면한 채 성장만 추구해서다 등등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이 모든 원인을 ‘골프’라는 단 두 글자로 요약했다. 정경유착과 한심한 정책들이 골프코스에서 탄생했다는 얘기다. 골프도 대중스포츠로 봐야 한다고 우겨봐야 소용없다. 아직까지는 파워엘리트의 신분을 상징한다. “등산은 되고 골프는 안 되느냐”는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말은 그래서 개그 수준이다.
▷이번엔 우리 정부가 총출동해 ‘골프 개그’를 연출했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부적절한’ 3·1절 골프 파문으로 물러난 뒤 국가청렴위원회가 공직자들에게 직무관련자와의 골프 금지령을 내린 것이 23일.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의 김남수 비서관은 이를 비웃듯 26일 현대그룹 임원 등과 골프를 쳤고 다음 날 이강철 대통령정무특보는 “정무적 판단 없는 한건주의”라고 청렴위를 비판했다. 청렴위는 닷새 만에 “직무관련자란 민간인만을 뜻한다”고 물러섰다. 사실상의 금지령 해제다.
▷‘도덕성이 존립기반’이라는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골프장에서 부정한 일을 한다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골프 금지령 해프닝은 이 정부의 수준을 보여 준다. 골프에도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정무특보는 정무적 판단에 따라 청와대 코앞에 횟집을 차리는지 묻고 싶다. 공직자 기강을 세운다며 나섰다가 맥없이 주저앉은 청렴위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