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반병희]칼과 신뢰

  • 입력 2006년 3월 2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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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5년 로마 교황 이노센트 4세는 몽골제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몽골군의 유럽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절단은 몽골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점령지 동유럽의 한 전략 요충지에서 야간 경계를 서던 병사가 잠이 들었다. 누구한테 들킨 것도 아니지만 이 병사는 잠든 사실에 스스로 놀라 지휘관에게 자신의 잘못을 보고했다. 지휘관은 병사의 정직성을 높이 칭찬하면서도 처형을 명령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몽골 병사는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는 사제들에게 “내가 잠든 시간에 적이 쳐들어 왔더라면 우리 군대는 큰 희생을 치렀을 것입니다. 경계병이 잠을 잔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요”라고 말하며 지휘관이 던져 준 칼을 담담히 집어 들어 자결했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믿음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 신뢰사회였기에 몽골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반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을 정복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은 주변을 신뢰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말라리아로 죽은 것으로 전해졌지만 측근 인사들에 의한 독살이라는 분석도 많다. 알렉산더 대왕은 일반 병사와 정복지 시민에게 한없이 관대했다. 전쟁터에서는 부상당한 병사의 피고름을 입으로 직접 빨아내 감동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동지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를 말다툼을 하던 중 목 벨 정도로 측근에게는 냉정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암살을 목격했던 경험이 그를 의심에 가득 찬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신뢰를 받지 못한 주변 인사들은 언제 휘두를지 모를 알렉산더의 칼 때문에 항상 불안해했던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1530년대에 창립한 중국 식료품 제조업체 류비쥐(六必居)는 ‘최고 경영진은 반드시 직원 중에서 선발한다’는 경영 원칙을 지금껏 무려 500년 동안 지켜 왔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총리가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신뢰의 류비쥐는 아직도 건재한가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미국 듀폰그룹은 구성원 간의 신뢰를 최고 덕목으로 삼아 온 덕택에 200년 이상 세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들어 우리 사회에 디바이드(divide)라는 말이 부쩍 유행하고 있다. 디지털 디바이드, 잉글리시 디바이드, 크레디트 디바이드. 최근에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 언어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랭귀지 디바이드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우성인자와 열성인자로 나누는 디바이드는 현 정권에 의해 증오의 의미까지 가미돼 ‘양극화’라는 말로 포장된다.

집권 여당의 지도층 인사들은 이것도 부족한지 실업계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면서 ‘부자 부모를 둔 아이는 비싼 과외를 받아 좋은 학교에 가고, 부자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이는 영원히 가난할 수밖에 없다’며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업고’와 ‘일반고’를 편 가르기 하고 있다.

양극화를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신뢰를 회복하자’는 말은 어디를 둘러봐도 들리지 않는다. 신뢰의 가치를 버린 채 나와 다른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는 당동벌이(黨同伐異)는 함께 망하는 지름길이다.

반병희 사회부 차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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