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한기흥]장성택

  • 입력 2006년 1월 31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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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장성한 자식이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겠다고 우길 때 특히 그렇다. 김일성(金日成) 북한 주석도 그랬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 권력을 휘두른 그였지만 장녀 경희(敬姬)가 평범한 집안의 청년과 사랑에 빠졌을 때 두 사람의 결합을 끝내 막지 못했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1972년 김 주석의 사위가 된 북한판 러브스토리의 남자 주인공은 김일성종합대 정치경제학과 출신인 장성택(張成澤)이다.

▷“체격 좋고 잘생긴 미남이며 똑똑한 남자다. 오죽했으면 공주님이 반했겠는가.” 1991년 북한 외교관으로 처음 한국에 망명한 고영환 씨는 ‘평양 25시’라는 수기에서 김경희의 마음을 사로잡은 장성택을 이렇게 평했다. 실제로 그는 성품 좋고, 노래와 춤, 술도 잘해 네 살 위 처남인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주말 ‘비밀 파티’에도 자주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장성택은 김 위원장이 북한의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근위대 역할을 한 당 청년 및 3대 혁명 소조부 부장을 거쳐 1995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됐다. 사법 검찰 공안 기능을 관장하는 막강한 자리다. 2002년 10월엔 북한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제2인자’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2003년 7월 이후론 공식 석상에 등장하지 않았다. ‘권력욕에 의한 분파 행위’로 가택연금을 당했다거나 정치수용소에 수감됐다는 설(說)이 난무했다.

▷그런 그가 28일 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복권(復權)은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10∼18일) 직후 확인돼 특히 관심을 끈다. 경제개혁과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한 김 위원장이 핵심 측근인 그에게 이를 맡기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 때문이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그가 중국의 부도옹(不倒翁) 덩샤오핑(鄧小平)이 과거 복권 후 그랬던 것처럼 개혁 개방의 주역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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