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박용기]세계최초 금속활자공의 후예들

  • 입력 2005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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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 금속활자를 발명한 독일인 구텐베르크는 한낱 인쇄공이 아니라 서양 문명의 물줄기를 크게 바꾼 인물이다. 서양의 종교개혁과 근대화는 성경과 사상 서적이 일반에 대량 보급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금속활자 이전의 필사본 출판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많은 외국인은 금속활자를 발명해 역사를 바꾼 인물로 구텐베르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 초 충북 청주에서 열린 행사 하나를 의미 있게 지켜봤다. 바로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의 ‘제1회 직지상’ 시상식이었다. 필자가 인쇄업을 하고 있어서인지 시상식을 보면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직지상은 ‘세계기록유산의 노벨상’이라 할 만하다. 이런 상에 ‘직지’라는 이름이 붙다니,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직지. 원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1377년(고려 우왕 3년) 청주의 흥덕사라는 절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불경이다. 상하 2권으로 발행됐는데 아쉽게도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 직지가 2004년 유네스코로부터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된 데 이어 직지상 시상식까지 열린 것이다. 금속활자 발명자가 구텐베르크가 아니고 우리 선조라는 사실이 재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문화민족임을 늘 자랑한다. 5000년의 역사를 지녔기에 당연하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글과 활자가 없었다면 이런 긍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비록 이름은 남기지 못했어도 금속활자를 발명해 낸 선조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주변에서 활자를 찾아보기란 정말 어렵다. 컴퓨터 인쇄 덕분이다. 활자는 대부분 고물상을 거쳐 쇳물로 변해 버렸다. 좀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인쇄 방식으로 옮겨 가는 것은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지만 우리의 자랑인 금속활자를 박물관에서나마 잘 보존하기 바란다.

현재 전국의 인쇄업체는 1만6000여 개에 이른다. 종사자도 30만 명이 넘는다. 그들은 늘 인쇄 종주국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래서 인쇄가 우리나라 문화업종 중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업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연간 수출액이 2억 달러를 넘으니 말이다.

인쇄와 인연을 맺은 지도 30년이 지났다. 가끔 누군가를 만나서 인쇄업을 하고 있다고 하면 “명함 한 통에 얼마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인쇄라고 하면 명함이나 찍는 구멍가게식의 인쇄공장을 떠올리게 되는 모양이다. 사실 인쇄업체를 설립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인쇄기계 한 대가 수십억 원이며 컬러로 된 책자를 인쇄하고 제책할 정도의 시설을 갖추려면 100억 원 이상이 투자돼야 한다.

인쇄인들은 인쇄가 명함쯤을 찍고, 출판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받는 데 분노한다. 인쇄기술이 형편없다면 출판은 어떻게 할 것이며, 각종 홍보물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래서 인쇄인들은 인쇄기술이 발전하지 않고는 문화 발전이 불가능하고 지식산업의 발전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인쇄업계의 숙원사업이던 전용인쇄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의 책임을 맡아 지난해 준공식을 가졌다. 필자가 운영하는 인쇄업체도 경기 파주시 조리면의 7만여 평에 이르는 파주인쇄정보산업단지에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인쇄회사가 이렇게 크고 친환경적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인쇄가 중요한 문화산업 분야로 인식될 때, 그리고 인쇄인들이 금속활자 발명국의 후손으로 자긍심을 갖고 일할 때 문화와 지식산업의 발전은 훨씬 빨라질 것이다.

박용기 파주인쇄정보산업단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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