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報 독자인권위 좌담]가정의 비밀과 몰카

  • 입력 2005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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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지은 위원, 김일수 위원장, 최현희 유의선 위원. 강병기  기자
왼쪽부터 이지은 위원, 김일수 위원장, 최현희 유의선 위원. 강병기 기자
《허리띠로 부인의 목을 조르는 남편, 어머니에게 발길질을 해대는 아들. 내밀한 가정폭력의 생생한 현장이 몰래카메라에 잡혀 TV를 통해 안방에 방영됐다. ‘연예인 X파일’ 사건, 국가정보원 도청 파문 등으로 사생활 침해의 불안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방송사가 최근 가해자 모르게 남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폭행 현장을 녹화 방영해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에서는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고발해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며 방송사의 공익적 의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가족 구성원들의 인권이 무방비 상태로 훼손됐다는 거부감도 만만치 않다. 본보 독자인권위원회는 9일 이 프로그램과 관련해 ‘가정의 비밀과 몰래카메라’를 주제로 토론했다.

사회=육정수 본보 독자서비스센터장》

―사적(私的) 공간인 가정에 가해자 모르게 카메라를 설치하고 폭행 장면을 녹화 방영한 프로그램에 인권 침해의 소지는 없을까요.

▽유의선 위원=사회적 약자의 보호라는 공익성을 앞세운다 해도 피해자의 일방적 동의만으로 문제가 없다고 봐야 하는지에 초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감안하더라도 불법으로 수집된 정보는 기본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보통의 취재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취재하려는 노력은 이해하지만 이번 프로그램의 경우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있어요. 미국에서는 연방법원과 대부분의 주(州) 법원이 부부 중 일방의 동의만 받으면 비밀 녹음을 증거로 인정하지만, 미시간 미네소타 주 등 10여 개 주에서는 반드시 쌍방의 동의를 얻어야만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최현희 위원=촬영이 끝난 뒤까지도 가해자의 동의가 없었다면 일방적으로 방영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마약 투여 혐의로 구속됐던 인기 탤런트가 수의를 입은 모습의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명예가 훼손됐다며 사진을 유포한 경비교도대원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대법원에서 배상판결을 받아낸 사례도 있습니다. 범죄혐의를 받고 수감된 사람은 물론 유죄로 확정된 사람도 초상권이 인정되는 상황이지요.

▽이지은 위원=의처증이 있는 남편에게 맞고 사는 부인이라면 그동안 몸에 난 상처만으로도 충분히 폭행 사실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 판단되는데 굳이 몰래카메라를 동원해 ‘생생한 장면’을 찍어 시청자들에게 보여 줘야 했는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부인의 동의만 얻은 상태에서 ‘폭력 남편’이 모르게 카메라를 설치한 것은 덫을 놓고 기다리다가 증거를 잡은 셈이 됩니다. 일방의 동의만 있어도 카메라를 마구 들이댈 수 있다는 인식이 번져 나가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김일수 위원장=가정폭력특별법의 제정은 가정폭력이 종전 불개입을 원칙으로 하던 ‘사적 영역’에서 ‘공적(公的) 영역’으로 들어 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은 물론 이웃 사람도 가정폭력을 수사기관에 신고해 형사사건화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언론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가정폭력에 경종을 울리는 사회적 이익과 사생활 침해를 받지 않을 주거권이 서로 충돌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가족 구성원은 주거권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의 사전 동의 없이 피해자의 일방적 동의만 얻은 것이라면 허용되기 어렵습니다. 법이 보호하는 주거권이나 사생활의 비밀이 과도하게 침해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금도(襟度)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방송 프로그램의 일탈에는 시청률을 의식하는 것 외에 시청자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유 위원=몰래카메라는 일차적으로 공익적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을 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몰래카메라로만 치유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인과관계가 증명돼야 합니다. 교통법규 위반 차량을 숨어서 찍는 것도 ‘함정 단속’이라는 지적에 따라 철수하는 실정입니다. 가정에 몰래카메라를 들이댄 것은 합법, 불법을 떠나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시청자가 그런 프로그램을 즐긴다는 점이 공익성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이는 시청률을 의식한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을 만합니다.

▽최 위원=피해자의 진술이나 진단서, 이웃의 목격 진술로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데도 몰래카메라를 동원한 것은 범죄 현장을 엿보고 싶은 ‘관음증’을 건드려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자 하는 선정성이 개입돼 있습니다. 20년간 장기 폭력에 노출돼 이미 만신창이가 된 피해자에게 ‘방송을 위해 한 번 더 맞아 달라’고 부탁하는 셈이니 가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인권도 침해하는 결과가 됩니다. 아무리 공익적 목적을 앞세운다 해도 이것은 합리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이 위원=폭행 장면을 굳이 끝까지 영상으로 담아내야만 할 상황도 아니라고 봅니다. 물고문을 하고 허리띠로 목을 조르는가 하면 흉기를 휘두르는 장면을 계속 방관하다가 폭행이 끝난 후에야 문제 해결을 한다고 나서다니 어이가 없어요. ‘몰래카메라는 재미있고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상이 널리 퍼져 있어 걱정됩니다. 연예인 등을 대상으로 한 몰래카메라와 우범 현장에 설치된 몰래카메라 등이 긍정적 반응을 얻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청자들은 갈수록 더욱 짜릿한 프로그램을 원하고 방송사는 시청률을 의식하다 보니 상승작용을 일으키지 않나 여겨집니다.

▽김 위원장=가정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안식처입니다. 가정폭력이 상습적으로 일어날 경우 법적 절차를 통한 접근금지 등의 보호 장치가 법에 상세히 규정돼 있습니다. 가정의 신비성이 함부로 노출돼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남의 가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언론이 도덕적 우월성을 앞세워 ‘이미 깨진 가정이니 해체해야 마땅하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독선일 뿐입니다. 방송사 스스로 도덕적 규범을 바로 세우고 품격을 높이려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정리=김종하 기자 1101ha@donga.com

▼참석자 명단▼

김일수 위원장 (金日秀·고려대 법대 교수)

유의선 위원 (柳義善·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 학부 교수)

이지은 위원 (李枝殷·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

최현희 위원 (崔賢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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