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0년 여배우 메르쿠리 출생

  • 입력 2005년 10월 18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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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영화 팬이라면 바흐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배우 앤서니 퍼킨스가 ‘페드라!’를 외치며 스포츠카를 몰고 절벽 아래로 돌진하던 영화 ‘죽어도 좋아’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해 새어머니와 젊은 아들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이 영화에서 순정한 청년의 마음을 앗아간 새어머니 페드라는 그리스 여신처럼 비장미가 넘치는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였을 뿐 아니라 정치가로도 유명한 메르쿠리는 1920년 10월 18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1955년 영화 ‘스텔라’를 통해 데뷔한 뒤 남편인 줄스 다신 감독이 만든 ‘일요일은 참으세요’ ‘죽어도 좋아’ 등의 영화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주목받기를 즐겼던 메르쿠리에게는 배우뿐 아니라 정치인의 피도 끓었다. 할아버지는 아테네 시장이었고 아버지도 정치인이었던 가계답게 메르쿠리 역시 정치활동을 하다 1967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게 국적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되고 만다.

국적을 빼앗겼을 때 그가 한 말은 유명하다. “나는 그리스인으로 태어났고 그리스인으로 죽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 민간정부 수립 운동을 벌였던 메르쿠리는 1974년 군사정권이 무너지자 고국에 돌아와 1977년 고향인 아테네의 빈민지역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메르쿠리의 제2의 전성기는 1981년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에서 문화장관에 임명되면서 만개했다.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항해 ‘유럽의 문화수도’ 아이디어를 내 1986년 아테네가 유럽연합(EU)에 의해 첫 번째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그리스 유물 ‘엘진 마블’의 반환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담배를 즐겨 피우던 메르쿠리는 1994년 미국에서 폐암 치료를 받다 숨졌다. 누구보다 강인해 보인 그였지만 투병생활을 할 때조차 두려워한 일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테네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엔 수백만 시민이 참여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두려움은 괜한 걱정이었던 것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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