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정부가 만든 투기장관?

  • 입력 2005년 10월 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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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부부가 평균 기대수명(남자 77.5세, 여자 82.2세)까지 살아가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만 영위하는 데도 2억6000만 원이 들고 조금 낫게 생활하려면 최소 5억 원 정도 든다고 한다. 2년 전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추산한 것이니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액수가 좀 더 늘어날 것이다. 살 집이 따로 있어야 하고 큰 병치레 안 한다는 걸 전제한 것이니 상당히 큰 돈이다.

이런 얘기를 듣는 사람들 중엔 자포자기 심정으로 한숨지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천하태평인 사람도 있을 게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자신의 현재 소득과 자산을 계산하면서 어떻게 이 돈을 마련할지 한번쯤 고민해 보지 않을까. 법과 정부의 정책을 살펴가며 최선의 재테크 방법을 찾는다 한들 탓할 일도 아니다. 월급쟁이 고위직 공무원이라고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이 엊그제 발표한 ‘정부가 만든 투기장관 25명’의 경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 정부의 장관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 39명 가운데 25명이 실수요가 아닌 주택이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인데, 8·31 부동산 종합대책이 정한 기준에 따르면 투기에 해당된다는 게 이 의원의 주장이다. 정부가 8·31대책을 발표하면서 “보유세와 양도세를 강화해 투기 수요를 억제하고 투기적 이익을 철저히 환수하겠다”고 했으니 이 의원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이 보도를 접한 국민들 중엔 ‘×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비아냥거리거나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설사 그런 소릴 들은들 달리 할 말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이 의원도 지적했다시피 이들을 모두 부도덕한 투기꾼으로 보는 건 온당치 않다. 고위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반인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건전한 재테크까지 탓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나름의 합당한 이유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궁금한 건 있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아파트 등 부동산 투기는 ‘사회적 암’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이들은 이 말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발언의 당사자인 이 총리는 논외로 치더라도 나머지 24명은 자신들의 경우 투기가 아닌 건전한 재테크(투자)를 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자위했을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8·31대책으로 졸지에 투기꾼의 반열에 들게 된 일반인들은 지금 대부분 가슴 졸이며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중에는 지극히 도덕적인 줄로만 알았던 고위 공직자들도 같은 처지임을 확인하곤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위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부의 정책은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생명이다. 물론 사회 공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변경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최소한에 그치는 게 좋다. 그러지 않으면 해당 정책은 물론이고 정부마저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더구나 이번의 경우처럼 자가당착의 허점까지 보인다면 더 말할 나위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고위 공직자까지 ‘사회적 암’으로 내모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진녕 정치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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