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2년 한강종합개발 기공

  • 입력 2005년 9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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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갈을 보았는가.’

1986년 가을 황금시간대에 한 방송사가 방영한 TV 다큐멘터리 제목이었다.

한강종합개발 완공을 맞아 방영된 이 다큐멘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1982년 최고지도자는 한강변의 자갈더미를 보고 그 활용방안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양질의 골재를 팔아 그 돈으로 한강을 정비하겠다는 획기적인 계획을 내놓는다.”

다음 날 많은 시민이 이 ‘돌(石)비어천가’를 화제에 올리며 정권의 수족 노릇을 하는 방송계 상황을 한탄했지만, 한강종합개발은 당시 상당한 성과를 가져온 제5공화국의 치적임에 분명했다. 시간을 거슬러 1982년 9월 28일로 되돌아가면….

오전 10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마포대교(당시 서울대교)와 원효대교 사이에서 부인과 함께 단추를 눌렀다. 맞은편 마포 쪽의 강가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박수가 터졌다.

‘한강 운하시대 열린다.’ 신문은 한강종합개발의 청사진을 이렇게 소개했다. 수중보를 설치해 주운(舟運) 등 강의 기능을 살리는 것을 비롯해 △210만 평의 둔치를 시민의 휴식처로 개방하고 △강변도로(현 올림픽대로)를 최고 8차로까지 확장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잠수교를 분리해 배가 지날 때 들어 올린다’는 계획도 소개됐지만, 다리를 들어 올릴 때의 교통 정체를 고려해 훗날 ‘없던 일’이 됐다.

공사는 계획보다 1년을 넘겨 1986년 완료됐다. 예전에 없던 넓고 푸른 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홍수 걱정도 덜었다. 융단처럼 펼쳐진 둔치 공원도 인기를 끌었다.

권위주의 정권이 물러간 1990년대 초 한강종합개발에 대한 비판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두 군데의 수중보로 인해 평균 유속이 1초에 10cm에 불과해진 한강은 ‘죽은 호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한강을 찾는 새의 종(種)이 크게 바뀌었고 생태계 파괴를 불러왔다는 비판도 컸다.

그 뒤 다시 10년여, 바닥을 파내고 콘크리트 벽을 쌓은 한강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으로 다가와 있다. 개발시대에 걸맞은 역할을 하고 퇴장한 복개 청계천이 그랬듯, 한강도 언젠가는 오늘날의 모습에 맞는 역할을 마치고 한층 자연친화적인 모습으로 바꾸어가지 않을까.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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