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년 기획2부-성취와 도전]대한민국의 성취

  • 입력 2005년 8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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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당시 한국은 이렇다 할 산업 기반이라는 것이 없었다. 문맹률은 80%나 됐고 해마다 보릿고개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볼펜 한 자루도 만들지 못하는 나라였다. 1960년대가 시작될 때까지도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절대 부족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세계 11위, 수출액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1만4000달러를 넘어 대만보다 높다. 철강 조선 정보기술(IT)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부를 만하다. 고도 압축성장 과정에서 물론 성장통(成長痛)과 부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일정 부분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다수의 시각이다. 그 눈부신 성취를 구체적인 통계 수치와 함께 살펴봤다. 》

▽경제성장▽

1953년 13억 달러에 불과했던 GDP는 2004년 6801억 달러에 이르게 됐다. 무려 523배로 늘어난 것. 이에 따라 지난해 GDP 기준 경제규모는 세계 11위로 10위권 진입에 바짝 다가섰다.

1960년대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국민에게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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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7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년 1만841달러에 이르렀고 2003년부터 대만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그 격차가 더 벌어져 세계 30위인 우리나라는 1만4162달러, 31위인 대만은 1만2381달러다.

소득수준이 향상되면서 저축률도 높아졌고 이에 따라 투자재원 자립도도 커졌다. 1980년대 후반에는 저축이 투자를 초과하게 돼 해외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해외 원조를 받던 나라가 투자국이 된 것이다. 2003년 해외 투자액은 35억 달러였다.

▽교육-수명

성취의 저변에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국민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이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는 것이 교육열. 중학교 진학률은 1965년 54.3%였으나 1980년 95.8%가 됐고 1995년 이후 99.9%를 유지하고 있다.

2000년에 이르러서는 고등학교도 거의 완전 진학률에 이르렀다. 국가가 의무교육을 확대하기 전 국민이 고등학교 교육을 보통교육화한,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다.

특히 중고교 진학률은 1975∼80년에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현재는 대학교육 진학률도 80%에 육박한다. 문맹률이 사실상 ‘0’이 되면서 문맹 통계도 사라졌다.

개개인의 삶의 질은 점점 개선됐다. 행복도를 계측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한국인이 60년 전에 비해 더 건강하고 풍요한 삶을 살게 된 것은 확실하다.

1960년 52.4세였던 평균수명은 올해 77.9세로 늘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과 거의 차이가 없다. 또 끼니를 걱정하던 곤궁한 처지에서 남아도는 쌀과 비만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1990년 전후로 주택 공급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1987년 69.2%이던 주택보급률은 2002년 이후 100%를 넘긴 상황이다.

▽무역규모▽

한국은 수출 세계 12위, 수입 13위의 무역대국이다.

1964년 연간 수출액 1억 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1977년 100억 달러, 1995년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에는 2538억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경제의 외형이 커지는 만큼 산업구조도 변했다.

1953년 우리나라 경제는 농림어업이 GDP의 47.3%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농업국 모형으로 제조업 비중은 고작 9.0%였다. 그러나 40여 년 뒤 그 비율은 완전히 역전됐다.

2003년 농림어업의 비율은 3.6%다.

외국에 기술을 수출하고 거둔 로열티의 경우 1980년까지도 60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1990년 중반에는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실적을 올리게 됐다.

2000년에는 로열티로 2억 달러를 벌어 우리나라가 기술 수출국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T-의료▽

건강보험은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뒤 1988년 농어민에게, 다음 해에는 도시지역민에게로 확대됐다. 2002년 전 국민의 97.6%가 건강보험 대상자이며 나머지 2.4%는 의료보호 혜택을 받고 있다.

우리는 또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짧은 기간에 국토 녹화를 이룩한 조림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이었으나 1971년 그린벨트제도 도입, 1973년 치산녹화 10년 계획 수립 등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일관된 산림녹화 정책으로 우리 산에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10명 중 7명이 휴대전화 가입자며 인터넷 이용자는 인구 100명당 61명으로 세계 3위에 이른다. 초고속인터넷은 2002년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정보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또다른 ‘우리들의 성취’▼

광복 후 60년간 우리는 민주주의 정착 등 질적인 부문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민주화와 탈권위=군사독재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정치적 민주주의의 달성이 핵심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절정을 이뤘으며 이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적 정권 이양을 골자로 한 6·29민주화 선언으로 이어졌다.

여기엔 언론의 자유가 활짝 꽃핀 점도 영향을 미쳤다. 또 인터넷을 통한 시민 개개인 간의 자유로운 소통이 여론 결집에 큰 역할을 했다.

여성의 권리도 크게 신장됐다. 여성의 경제활동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고 정계 관계 법조계 경제계 등의 고위직에 여성 인사 임명도 두드러졌다. 가정 내 여성 차별의 상징이었던 호주제는 2008년부터 폐지된다.

▽투명한 사회=정경유착 등 음성적 거래를 차단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됐다. 이에 따라 검은돈의 거래가 상당히 위축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1980년대 중반 시민운동이 싹트기 시작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등 영향력이 큰 시민단체가 속속 출범했다.

이들 단체는 정치권과 재계를 상시 감시하며 낙천낙선운동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국제사회 위상 제고=한국은 1991년 9월 북한과 동시에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이는 노태우(盧泰愚) 정부가 1990년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북방 외교를 벌여 유엔 가입 거부권을 가진 소련 등 유엔 상임이사국들을 설득한 결과다.

한국은 또 1996년 12월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조정하고 세계무역의 촉진을 위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정회원국이 됐다.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결과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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