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현희]이동녕선생의 지도력이 그립다

  • 입력 2005년 3월 11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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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지낸 석오 이동녕(1869∼1940)이 중국에서 72세로 서거한 지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초대 의정원 의장(국회의장)으로 상하이에서 사회봉을 잡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1919년 4월.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그때를 분수령으로 보면 그의 생애 전반부 50년은 애국계몽 민권운동 국권회복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후 22년가량은 임시정부 터줏대감으로서 동지와 함께 광복정책을 폈던 형극의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충남 천안시 목천의 현 독립기념관 부근에서 의성군수를 지낸 이병옥의 장남으로 출생해 한문을 배우고 익혔다. 17세에 상경하여 응제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관리로 나가지 않고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승만 이준 등과 만민공동회장에서 항쟁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이종일이 창간한 제국신문사를 찾아가 논설 쓰기를 자청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서 개화 민권 사회계몽 과학기술 등에 관한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이후 기독교 운동에 참여하여 상동교회 내에 청년학원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백범 김구 등과 을사늑약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는 간도 룽징에서 이상설과 서전서숙을 설립해 운영하다가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양기탁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였고, 그 구체적 결실이 이회영 등이 세운 서간도 최초의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였다. 그는 교장으로 3500명의 군관을 길러 실전 배치하였다.

국내에서 인촌 김성수와 의암 손병희의 출자로 3·1운동이 일어나 민주국가 건설의 분위기가 고조될 때 석오는 시베리아에서 상하이로 갔다. 이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던 경험을 토대로 1919년 4월 동지의원 28명과 함께 프랑스 조계에서 의정원을 개설하고 초대 의장이 됐다. 10개조의 최초 성문법을 제정 축조심의하여 13일 3권 분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어 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이승만을 내각총리로 선출하고 7부의 각 총장(장관)을 선임함으로써 입법 행정부가 구성된 것이다. 86년 전의 일이다.

이날 석오는 “의원동지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대한제국이 아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입니까. 임시정부 만세”를 외쳤다.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로부터 22년간 그는 내무총장 등 각부 총장과 국무총리 국무령 주석 의장 등을 몇 차례나 지내면서 광복의 그날을 향해 병약한 몸에도 내정 외교 군사 교육 문화에 이르는 정책을 빈틈없이 추진했고 기관지 독립신문을 후원했다.

백범 등 동지 40여 명을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자신은 잘 드러내지 않고 동지를 치켜세우고 배려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백범은 백범일지에 자신을 키워준 분이 석오였다고 회고했다. 동지끼리 다툴 때는 “싸우려면 왜놈하고나 싸워”라며 호되게 일갈한 것은 그의 카리스마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떠나가신 지 65년, 새삼 그의 지도력이 그리워진다.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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