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3년 중앙선관위 발족

  • 입력 2005년 1월 20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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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헌법상 독립기관을 순시해도 되느냐.”

1964년 초 당시 사광욱(史光郁)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무소불위의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이렇게 일갈했다. 박 대통령의 순시는 ‘중앙선관위=대통령의 하부기관’이란 잘못된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1963년 1월 21일 중앙선관위가 헌법상 독립기관으로 정식 발족하기 전까지 선거 관리는 행정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1948년 3월 제정 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은 선거위원회를 내무부 부설기관으로 규정했다. ‘중립성 시비’는 태생적 한계였던 셈. 그 비극적 종말이 1960년 3·15부정선거였다.

같은 해 4·19혁명은 선관위의 독립성을 헌법에 새겨 넣는 역사적 계기가 됐지만 독립성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67년 7대 총선 때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는 관내 경찰서장과 읍장의 주도로 공개투표가 실시됐다. 1987년 대선 서울 구로을 투표함 사건은 선거 부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여전함을 보여줬다.

1988년 13대 총선 서울 영등포을 선거 관련 소송에서는 ‘선관위가 불법선거 운동을 고발하지 않은 것도 선거 무효의 원인이 된다’는 치욕스러운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 대해선 한준수 전 충남 연기군수와 이지문 중위의 관권선거 폭로가 잇따랐다.

선관위의 독립성은 이처럼 ‘아픈 만큼 성숙’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 중위의 내부 고발로 부재자투표소의 영내 설치가 금지됐다.

1992년 15대 대선 때 기표봉의 ‘○’ 안에 ‘人’ 표시를 넣었다가 이것이 당시 김영삼(金泳三) 후보의 머리글자(○人=영삼)란 오해가 생기자 다음 선거부터 ‘人’ 대신 ‘卜’으로 교체했다.

지난해 3월 3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중앙선관위의 ‘선거 중립 의무 위반’ 결정은 대통령 탄핵안 국회 표결이란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불러온 단초가 됐다.

선관위 직원이 가장 싫어하는 표현은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선거 관리 중립내각’ 또는 ‘선거 관리 거국내각’. 행정부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표현임을 이해하지만 선관위의 독립에 대한 국민적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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