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천광암]‘17조 원’

  • 입력 2005년 1월 17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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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가도 현찰 1억 원도 구경하기 힘든 서민에게는 1조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실감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물리적인 크기를 상상해 보는 방법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100억 원을 1만 원짜리 새 지폐로 쌓아올렸을 때 높이는 약 110m에 이른다. 남산 만 한 높이를 쌓아올리려면 1만 원권으로 약 237억 원이 필요하다. 1조 원의 높이는 에베레스트 산에 한라산과 남산을 합한 것과 맞먹는다.

▷지난해 해외여행과 유학, 의료서비스 등으로 해외로 흘러나간 돈이 17조 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1만 원권 기준으로 해외여행에 남산 174개, 유학 및 연수에 남산 309개, 의료 법무 광고 등 사업서비스에 남산 220개 높이 만 한 돈이 지출된 셈이다. 물론 이 돈이 모두 낭비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중 상당액은 인적자원의 질을 높이고 국내산업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까닭은 이 돈이 국내에서 쓰였다면 우리 경제가 지금처럼 심한 불황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7조 원이 국내에서 돌았다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8%포인트 높아졌을 것이라고 한다. 일자리로 따지면 실업자 9만 명 이상을 구제할 수 있는 액수다. 경제를 살리려면 지금이라도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대신 국내에서 돌게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정부가 “설에는 제발 국내에서 돈을 써 달라”고 국민에게 통사정하는 것도 일부 효과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역할 수 있는 국제화시대, 명색이 ‘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법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단계적 개방을 통해 교육 의료 법률 관광 레저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부자들이 국내에서 돈을 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만이 근본 해법이다. 시장보호는 해외시장과 국내시장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소비자 스스로 더 좋은 서비스를 찾아 국경을 넘나드는 경제 환경에서 ‘보호주의 빗장’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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