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재호]“새해엔 많이 들으십시오”

  • 입력 2004년 12월 21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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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경영철학은 ‘경청(傾聽)’이다. 말하기보다 남의 말 듣기를 더 좋아한다. 회의 때도 주로 듣는다고 한다. 간부가 핵심에서 벗어난 얘기를 해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끝까지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삼성 성공 신화의 적지 않은 부분이 최고경영자(CEO)의 경청 덕이라고 말하는 간부들도 있다. 언로가 막히거나 소통이 단절되는 일이 없으니 조직이 살아 움직이고, 그러니 실적을 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경청 능력’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삼성의 한 임원은 최근 “선대 이병철 회장이 (아들에게) 경청하는 참을성을 가르치기 위해 일본어로 된 경청법 책들을 많이 구해 읽도록 했다”고 회고했다. 훈련을 통해 습득했다는 얘기다. 고 이병철 회장도 생전에 ‘경청’이란 휘호를 즐겨 썼다.

듣기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송년회 철이어서 더러는 실감할 것이다. 모처럼 동창들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좀 많은가. 이런저런 자랑도 하고 싶고, 억울한 일 하소연도 하고 싶고….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안 온다. 으레 입심 좋은 동창 하나가 시종 혼자 떠들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또 왜 그리 큰지, 헤어질 때면 약까지 오른다. “내, 다시 나오나 봐라.”

사람들은 대체로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 욕구 때문이다. 잘 듣기 위해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인내심이 있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1, 2분만 지나면 벌써 짜증이 나고 주의는 산만해진다. 듣고 있는 척할 뿐 머릿속은 다른 생각들로 복잡하다. 어릴 때부터 듣기 훈련을 제대로 안 받아서 그렇다.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기로는 정치인만 하랴. 대중연설에 뛰어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좋아했던 말은 “총재님, 마이크 여기 있습니다”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의만 주재했다 하면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혼자서 얘기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말이 적다고 하기는 어렵다. 국무회의 발언 시간도 긴 편이다. 원고에 의존하기보다 즉석연설에 강한 데다가,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의 자기완결성을 높이기 위해 몇 번이고 부연 설명을 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일까. 말이 길어지다 보니 실수도 나오고 거친 표현도 나온다. 말이 곧 자신의 우환(憂患)이자 나라의 우환이 될 때도 있다.

세계적인 컨설턴트로 ‘듣기 먼저, 말하기는 다음’이라는 책(듣기력, 이코비지니스, 2004)을 쓴 토마스 츠바이펠은 듣기만 잘해도 성공한 CEO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주의해서 잘 들어라. 그러면 성공을 위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서 킹, 넬슨 만델라, 잭 웰치 전 GE 회장이 그가 뽑은 듣기에 성공한 지도자들이다.

‘듣기의 달인’이 되면 남의 말은 충분히 듣고 자신의 말은 짧게 하게 된다고 한다. ‘말하고 있는 동안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얘기도 있다. 새해에는 노 대통령에게 경청을 권하고 싶다. 마침 국정(國政) 운영의 기조도 바뀐다고 하기에….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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