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2년 하와이 이민선 첫 출항

  • 입력 2004년 12월 21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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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월 22일, 제물포 부두. 세찬 바닷바람이 불었다. 증기선 갤릭 호가 뱃고동을 울렸다. 정든 산천을 떠나게 된 121명은 착잡한 얼굴로 환송 나온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단발령이 내려진 지 7년이 지났지만 상투를 튼 이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인천 용동교회의 존스 선교사가 50여 명의 감리교인들에게 축도했다. 이윽고 증기선은 하와이 호놀룰루 항을 향해 천천히 멀어져 갔다. 오늘날 200만 명이 넘는 미국 한인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하와이가 한국 이민을 받아들인 것은 ‘나눠 다스리기(Divide and Rule)’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은 항상 일손이 달렸다. 1830년대 태평양 섬 주민을 대상으로 시작된 인력 수입은 1850년대 중국인 수입 붐을 거쳐 1880년대 일본인 노동자 붐으로 이어졌다. 1902년에 이르자 일인 노동자가 3만여 명으로 전체 노동력의 70%를 넘어섰다. 단결해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할 경우 문제가 커질 것이 뻔했다. 비(非)일본인의 비율을 높여야 했던 것이다.

빈곤과 기근을 피해 꿈을 찾아 떠난 길이었지만 새로운 땅에서의 생활 역시 척박했다. 새벽 다섯 시면 일터로 나가 매일 11∼12시간 동안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억센 수숫대를 잘라내야 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한인 노동자들은 백인의 10분의 1에 불과한 월 16∼18달러의 임금을 받으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인력 송출을 중단시킨 1905년까지 7226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며 한인 일부는 소규모 농장을 인수하고 일부는 도시로 진출해 자리를 잡았다.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 본토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정한 세력을 형성한 한인 사회는 예상 못한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08년, 하와이 이민자 출신인 장인환(張仁煥) 의사가 한국을 경멸하는 발언을 한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 이민사회는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도 하와이를 중심으로 미국 한인사회가 키워낸 거물이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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