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9년 재일교포 북송선 첫 출항

  • 입력 2004년 12월 13일 17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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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다. “편지해, 몸조심하고!” 조선어와 일본어로 나누는 안부 인사가 뒤섞였다. 여성들 중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많았다. 간간이 함성이 들렸다. 대한민국 재일 거류민단의 북송 반대 시위였다.

이윽고 뱃고동이 울렸다. 배 위에, 지상에 선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新潟) 항의 풍경이었다.

이후 1967년까지 8만8000여 명의 재일교포와 가족들이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한, 자유세계에서 공산세계로의 집단이주 사례였다.

재일교포 북송 문제가 처음 대두된 것은 1955년, 북한 외무상 남일이 ‘귀환하는 재일동포의 생활을 최대한 책임지겠다’고 천명하면서부터. 1958년에는 일본 주요 정당 인사가 망라된 ‘재일 조선인 귀국협력회’가 결성됐다. 1959년 일본, 북한 양측은 인도 콜카타에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북한으로서는 교포를 받아들일 이유가 충분했다. 체제 우위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전후 복구를 위한 재원과 고급 인력을 마련하기에도 그만이었다. 궁금한 것은 일본이 협력한 동기였다. 궁금증은 올해 5월 아사히신문의 보도로 풀렸다.

일본 메이지대 가와시마 다카네 교수는 극비문서 분류에서 해제된 일본 외무성 자료를 분석했다. 그는 당시 집권 자민당이 ‘재일 조선인은 범죄율이 높고 생활보호가정이 1만9000가구나 돼 보조 경비가 연간 17억 엔에 이른다’며 북송사업에 발 벗고 나선 사실을 밝혀냈다. ‘거주지 선택의 기본인권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포장된 북송이 사실상 ‘추방’이었던 셈이다.

동기야 어쨌든 북송교포는 북한 사회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북한 여성들은 초기 교포들의 밝은 옷차림과 거리낌 없는 태도를 모방했다. 대부분의 북송교포는 일본의 친지들에게 편지로 생필품 부족을 호소해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일부 돈 많은 2세는 ‘놀새’로 불리며 체제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김정일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최근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고영희 씨도 북송교포 출신이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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