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26>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2월 7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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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팽성 서쪽은 관중에서 나온 한군(漢軍)에는 퇴로(退路)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패왕이 거느린 초나라 군사가 군사적 요충이면서도 한군의 퇴로 길목이 되는 소성부터 먼저 떨어뜨리자, 그러지 않아도 술렁거리던 팽성 안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한줌도 안 되는 초나라 군사가 기세만 믿는 패왕을 따라 달려오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30만이 넘는 대군이 있고, 높고 두꺼운 팽성의 성벽이 있다.”

한신이 그렇게 장졸들의 기세를 북돋우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오래잖아 초군 선봉대가 서문 가까이 이르자 부근에 몰려 있던 한군 장졸들뿐만 아니라 대장군인 한신마저 간담이 서늘해졌다. 선봉대의 맨 앞에서 오추마에 높이 앉아 달려오고 있는 패왕 때문이었다.

“나는 서초 패왕 항우다. 유방은 어디 있는가? 어서 과인 앞에 가죽 두꺼운 낯짝을 내밀라 하라. 성을 짓부수기 전에 그 간사한 혀가 무어라고 제 죄를 감추는지 들어 보아야겠다!”

패왕은 우레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고는 다시 성안에 대고 소리쳤다.

“팽성 안의 군민(軍民)들은 듣거라. 이제 과인의 대군이 이르렀으니 더는 한나라 군사들의 종살이를 그만두고 모두 떨쳐 일어서라! 한군에 맞서 성문을 여는 자는 지난 잘못을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공에 따라 큰 상을 내리리라. 장수면 제후로 올려 세울 것이요, 이졸(吏卒)이면 장군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팽성 안에서는 감히 나서 대거리를 하려 드는 장수조차 없었다. 패왕의 엄청난 기세에 퍼렇게 질려 말없이 성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잖아 초군 본진(本陣)도 팽성 서문 밖에 이르렀다. 선봉과 합쳐 3만에 지나지 않았지만 성안의 한군에는 그 몇 배의 대군이 몰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성밖에 이르자마자 패왕이 기세를 타고 소리쳤다.

“이것들이 관을 봐야 사람이 죽은 줄을 알겠구나. 쳐라! 단숨에 성을 떨어뜨려 옥과 돌을 한꺼번에 태워 버려라!”

그러자 초나라 군사들이 함성과 함께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잇단 승리로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 초병(楚兵) 하나하나가 모두 맹분(孟憤)이 아니면 하육(何育·둘 다 전국시대의 이름난 용사)이었다.

한신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한군 장졸들을 다잡아 그런 초군을 막게 했다. 워낙 한군의 머릿수가 많은 데다 높은 성벽에 의지하고 있어 첫 번째 공세는 그럭저럭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북문 쪽에서 날아든 급한 전갈이 겨우 가다듬어 놓은 한군의 전열(戰列)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북문 쪽으로도 초나라 대군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초나라 장수 종리매가 이끌고 있는데 5만은 넘어 보이는 대군입니다. 역상((력,역)商)과 근흡(근(섭,흡)) 장군이 여러 제후군과 더불어 막고 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급히 군사를 나눠 보내 달라는 당부였습니다.”

북문에서 달려온 군사가 그렇게 말하자 서문 쪽에서 방금 한바탕 힘든 싸움을 치르고 한숨을 돌리던 장졸들은 다시 낯빛이 퍼렇게 질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망루에 있던 군사들이 놀라 외쳤다.

“초나라의 후군(後軍)이 몰려온다! 중군(中軍)보다 대군이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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