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99년 독립신문 폐간

  • 입력 2004년 12월 3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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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전용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이 창간 4년 만인 1899년 폐간된 날이다. 창간 때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으나 신문이란 본래 정부와 화합할 수 없는 법. 독립신문은 민중 계몽 연장선상에서 당시 수구 정부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폐간에 이르렀다. 정부는 당시 돈 4000원에 판권과 인쇄시설을 사들여 신문사 문을 닫았다.

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松齋 徐載弼·1864∼1951)은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5년 전, 혁명(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으로 도망가야 했던 그가 다시 쫓기다시피 간 것이다.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상념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역적’ 행위 때문에 부모, 형, 아내가 음독자살하고 동생이 참형되고 두 살배기 아들은 굶어 죽었다. 그는 미국에서 이런 비통한 소식을 전해 들으며 막노동으로 고등학교와 의대를 졸업했다. 그 사이 갑오개혁으로 세상이 바뀌어 국내 인사들이 정부의 고위직을 보장하며 귀국 종용을 하자 ‘권세에는 관심 없으니 신문으로 계몽운동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며 11년 만에 환국했던 그였다. 그러나 4년 만에 꿈을 접고 다시 고국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다시 쫓겨 간 미국 땅에서 의사로 여생을 편히 살 수 있었건만, 그는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진 조국을 버려둘 수 없었다. 문방구, 인쇄업, 의사 일을 전전하며 번 돈을 독립운동에 바쳐 가산을 탕진하고 건강까지 잃었다. 그리고 여든한 살이 되어서야 광복을 맞았다.

미 군정장관 하지는 이 노옹(老翁)에게 건국의 일꾼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조국에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48년 만에 귀국하지만 1년 4개월 만에 다시 떠나야 했다. 그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경계했던 국내 인사들의 견제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이국에서 쓸쓸히 죽어 간 그의 유해는 1994년 문민정부에 이르러서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한국 최초 신문의 운명과 창간인의 운명은 한국 신문사(新聞史) 그대로다. 한국의 신문은 이처럼 한 초인의 힘으로 시작됐다. 그 정신은 광복 후 압제적 정권들에서도 이어져 기자들은 통제를 뚫고 금지된 소식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리려 애썼고, 독자들은 그런 기사들의 행간을 읽었던 시절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신문을 적으로 삼아 폐간까지 했던 정부를 겪었던 서재필은 1세기가 흘렀건만 아직도 신문을 적으로 생각하는 정부가 존재하는 이 시대를 보며 무덤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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