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히포크라테스’…사랑이 있는 곳에 의술이 있다

  • 입력 2004년 10월 29일 16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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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버밍엄의 리스터 힐 도서관에 있는 그리스 조각가 코스타스 게오르가카스의 히포크라테스 상. 회화와 조각 속의 모습과 달리 실제의 히포크라테스는 대머리였던 것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영국 버밍엄의 리스터 힐 도서관에 있는 그리스 조각가 코스타스 게오르가카스의 히포크라테스 상. 회화와 조각 속의 모습과 달리 실제의 히포크라테스는 대머리였던 것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히포크라테스/자크 주아나 지음 서홍관 옮김/751쪽 3만5000원 아침이슬

“이제 의업(醫業)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선언하노라….”

모든 의사가 평생 간직해야 할 신조를 담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첫 부분. 2400여년 전인 기원전 460∼기원전 377년경 살았던 히포크라테스가 왜 오늘날까지 ‘의학의 성자’로 기억되고 있을까.

프랑스 파리 제4대(소르본대) 그리스 역사학 교수인 저자는 히포크라테스 당대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역사서와 서사시, 희곡 등 방대한 문헌과 유물을 검토해 ‘의성(醫聖)’의 생애와 그의 선진적 정신, 후대에 남긴 영향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린다.

히포크라테스의 의술은 그리스 멸망 후 아랍어와 라틴어로 번역돼 아랍과 유럽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17세기까지도 현실 의학계에서 응용됐다. 그러나 그의 지식 자체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체 내부에 대한 관찰이 제한됐던 탓에 ‘자궁이 간으로 파고든다’는 등의 엉뚱한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여겨졌던 ‘4 체액설’은 실제로는 그의 제자 플라보스가 창안한 것이었지만, 그의 이름이 주는 권위 때문에 17세기 하비의 ‘혈액 순환론’이 인정받는 데 장애가 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20세기에도 추앙받게 된 이유는 이론 자체보다 그의 합리적 정신과 고결한 이상에 있었다.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질병은 신의 징벌이며, 무당에게 의지해 하늘에 비는 것만이 징벌을 피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는 ‘병을 신성하다고 하는 것은 무지를 은폐하는 술수’라고 질타했다. ‘신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져 보고, 그리고 추론하라’고 그는 가르쳤다.

그를 움직인 동기는 명예나 돈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의술도 있다’고 가르쳤다. 문헌에 나타나는 그의 환자는 귀족과 하층민, 노예의 구별이 없었다. ‘진료실에는 항상 정갈한 음료를 준비하라’ ‘팔다리를 힘을 주어 당겨야 할 경우에는 부드러운 천으로 팔이나 다리를 감싸라’고 지시하는 등 그의 최우선 과제는 ‘환자의 복리’였다.

흥미롭게도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지 않았다. ‘선서’는 다른 가문의 의사 지망생들이 그의 집안에서 의학 공부를 하기 전에 치르는 절차였다. 오늘날 ‘선서’ 문안도 실제로는 1948년 세계의사협회가 만든 ‘제네바 선언’으로, ‘히포크라테스 총서’에 나오는 내용과 차이가 있다. ‘총서’에 나오는 선서에는 의술의 고귀한 이상 속에 ‘내가 배운 내용을 내 아들과 스승의 아들과 선서에 서약한 다른 제자들에게만 전해줄 것이다’라는 배타적 내용도 들어 있다.

저자는 그가 위대한 의사를 넘어 당대 그리스에 인류학의 씨앗을 뿌렸고 인식론적 문제를 고찰했던 위대한 사상가였다고 강조한다. 의학의 완성을 위해 그는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관찰하면서 기후, 주민들의 생활방식, 식사와 음주습관 등을 정밀하게 비교 분석했다.

당대 궤변가들이 “의사의 치료를 받고도 낫지 않는 환자가 있고, 치료를 받지 않고도 낫는 환자가 있으니 의술이란 허구 아닌가”라고 말하자 그는 질병 치유의 원인으로 ‘기술’과 ‘우연’을 대조시키고, ‘서투른’ 의사와 ‘유능한’ 의사가 구별됨을 상기시켜 효과적으로 반론을 펼 수 있었다. 원제 ‘Hippocrate’(1992년).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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