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72>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5일 18시 01분


코멘트
은왕(殷王) 사마앙의 군사들이 갑자기 동문으로 빠져나오자 잠들어 있던 한군(漢軍) 진채가 잠시 술렁거렸다. 기병 한 떼가 횃불을 밝히고 한참이나 사마앙을 뒤쫓는 시늉을 했으나 오래는 아니었다. 그 바람에 마음을 놓은 사마앙은 곧장 관도(官途)로 접어들어 한단(邯鄲)을 바라고 달렸다.

그런데 한 30리나 달렸을까, 갑자기 관도 곁 골짜기가 횃불로 환해지며 한 떼의 인마가 몰려나와 사마앙의 길을 막았다.

“은왕 사마앙은 어디 있는가? 사마앙은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한(漢) 기장(騎將) 관영이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횃불로 보아서는 몇 만인지도 모를 보졸들을 뒤로 하고 수백 철기(鐵騎)와 더불어 앞장 서 길을 막고 섰던 장수가 크게 소리쳤다.

그래도 사마앙은 선선히 항복할 처지가 못 되었다. 어떻게든 헤치고 나아가볼 작정으로 이끌고 있던 장졸들에게 소리쳤다.

“겁먹지 말라.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힘껏 부딪쳐 흩어버리고 산동(山東)으로 가자!”

하지만 사마앙의 장졸들은 사정이 달랐다. 골라 뽑은 3000이라지만, 목숨 바쳐 사마앙을 따라야할 대의 같은 것은 없었다. 거기다가 한군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놀라고, 횃불 때문에 실제보다 몇 배나 많아 보여 먼저 기가 죽고 말았다. 태반은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다.

밤길을 쫓겨 온 1000명 남짓으로 이틀 전에 와서 쉬며 기다린 5000 사이를 뚫고 나가자니 일은 처음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사마앙이 장졸들을 다잡아 좌충우돌 한군과 부딪쳐 보았으나 끝내는 몇 겹으로 에워싸이고 말았다. 그래도 사마앙은 항복하지 않고 작은 언덕에 의지해 다시 한 시진을 싸웠다.

그때 다시 서쪽에서 수많은 병마가 달려왔다. 그 한 갈래가 한군을 헤치고 똑바로 사마앙의 군사들 쪽으로 달려오더니 두 장수가 횃불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은왕은 어디 계시오? 과인은 하남왕 신양이오.”

“사마 장군은 어디 있는가? 나 장이(張耳)가 할말이 있으니 잠시 얼굴을 내밀라!”

사마앙은 그 소리에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맥이 쭉 빠졌다. 항복하면 죽지는 않겠지만, 그곳을 빠져나가 부모처자를 구할 길도 없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었다.

“대왕은 어찌 한왕께 항복하여 대의를 밝히지 않고 어리석고 무도한 항우를 쫓아 죽으려 하시오? 한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정리로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이렇게 달려왔소.”

사마앙을 알아본 하남왕 신양이 먼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장이가 그 뒤를 이었다.

“사마 장군의 가솔들이 모두 팽성으로 끌려간 일은 한왕께서도 잘 알고 계시오. 하지만 우리 한군이 멀리 제나라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항왕보다 먼저 팽성으로 들어가면 무슨 걱정이 있겠소? 어서 한왕께 항복하여 가솔도 구하고 천하평정의 대업에도 공을 이루시오.”

그렇게 되자 사마앙은 더 버티려야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말에서 내려 항복하고 말았다.

글 이문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