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70년 나폴레옹 3세 폐위

  • 입력 2004년 9월 3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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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두 번씩 나타난다. 첫 번째는 비극(悲劇)으로, 두 번째는 어리석은 광대극으로….”(마르크스)

1821년 마침내 나폴레옹 1세의 비극이 막을 내리자 주연이 바뀐 소극(笑劇)이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숭배하는 흐름이 일기 시작했다. 그의 독재에 관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잊혀지거나 미화됐다. 그는 보통사람들의 구세주로 추앙받는다.

‘나폴레옹의 향수(鄕愁)’는 보나파르트가(家)의 종주(宗主)를 자처하며 고군분투하던 조카의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망명지에서 떠돌았던 루이는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로 돌아온다.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에 프랑스인들은 설레었다. 루이는 ‘나폴레옹 이념’의 적자(嫡子)임을 내세우며 1850년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의 백부(伯父)가 그러했듯이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왕관’을 쓴다. 나폴레옹 3세의 등극이었다.

제2제정은 제1제정을 승계했다. 나폴레옹 3세에게도 강력한 중앙집권정부에의 열망과 공화주의의 이상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제국’을 지향했다. “문명시대에 군사적 성공이란 일시적인 것이며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언제나 대중의 여론이다!”

그러나 크림전쟁과 이탈리아 독립전쟁, 멕시코 분쟁에 잇따라 휘말리면서 제2제정은 기력을 잃어갔고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로 그는 폐위(廢位)된다.

보나파르티즘은 모순이자 역설이었다.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격랑을 헤쳐 온 인민들의 상반된 열망을 반영하고 있었다. 어떻게 혁명의 열매를 간직하면서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

그것은 한편으로는 “위장된 민주주의”(빅토르 위고)였고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을, 프롤레타리아에 대해서는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수행했다.”(엥겔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근대적 민주주의의 이념과 강력한 중앙 권력을 동시에 체현했으니 프랑스 정치에 일대 ‘영감(靈感)’을 불어넣었다.

보나파르티즘은 ‘프랑스적 예외’를 이루어냈다!(막스 갈로)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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