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양희은 ‘아침이슬’ 발표

  • 입력 2004년 8월 27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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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MT’를 떠난 대학 신입생들은 밤을 지새우며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불렀고, 그렇게 그들은 ‘세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노래들이 있었기에 응어리진 젊음은 황량한 1970년대의 강(江)을 건널 수 있었다.

김민기가 짓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발표된 게 1971년 8월. ‘유신 공작(工作)’의 불온한 기운이 감돌 무렵이었다.

‘아침이슬’은 애상(哀想)과 사랑타령에 절어 있던 대중음악계에 일대 충격이었다. 그 맑은 서정(抒情)과 시대의 메시지는 서늘했다.

어떤 이는 양희은을 1960년대 자유와 민권의 상징이었던 미국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에 비유한다. 바에즈에게는 지구촌의 젊은이들을 ‘저항의 띠’로 묶었던 밥 딜런이 있었고, 양희은에겐 김민기가 있었다.

전태일의 분신과 ‘오적(五賊)’ 필화사건으로 뒤숭숭하던 1970년 어느 날, 두 사람은 만났다. 서강대에 다니던 앳된 단발머리의 여학생은 ‘아침이슬’을 듣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민기는 뭐가 못마땅했던지 악보를 찢어 내던졌고, 그 악보를 주워 일일이 테이프로 붙인 건 양희은이었다. 그 노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금지곡’이 될 줄이야.

문제는 가사였다. ‘태양은 묘지 위에/붉게 떠오르고?’ ‘묘지’는 남쪽 군사정부를, ‘태양’은 북쪽의 지도자를 가리킨다는 기막힌 해석이었다.

양희은은 시류(時流)에 부적합했던(?) 김민기의 ‘페르소나’였다. 양희은의 맑은 음색은 불에 덴 듯한 그 통증(痛症)의 음악을 감쌌다. “내겐 양희은이란 우산이 있어서 그 뒤에 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양희은에게 김민기는 “내 음악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절정이었다.”

1975년 발포된 긴급조치 9호는 마침내 포크음악에 족쇄를 채웠고 두 사람은 한동안 활동을 접는다.

양희은은 대중음악계의 ‘고립된 섬’이 되었고, 김민기는 수배를 받아 쫓겼다. 양희은에겐 항시 기관원이 2인1조로 따라붙었다. “김민기 언제 봤어? 그 친구 어디 있지?”

‘아침이슬’은 1987년 6·29선언 몇 달 뒤에 해금됐다. 발표된 지 15년 만이었다. 참으로 ‘긴 밤’을 지새웠다.

6·29 시위현장에서 100만명의 군중이 이 운동권의 성가(聖歌)를 따라 불렀으니, ‘아침이슬’은 그 스스로를 해금했던 것이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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