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한낮의 우울’…어두운 그림자 잊고 사랑하라

  • 입력 2004년 6월 18일 17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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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환자들은 흔히 “벼랑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다. 저자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우울증 환자 대부분이 겪는 대단히 물리적인 경험”이라고 말한다. 사진은 ‘잔다리 끝에 서 있는 여인’. 사진제공 민음사
우울증 환자들은 흔히 “벼랑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다. 저자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우울증 환자 대부분이 겪는 대단히 물리적인 경험”이라고 말한다. 사진은 ‘잔다리 끝에 서 있는 여인’. 사진제공 민음사
◇한낮의 우울/앤드루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722쪽 민음사 2만5000원

‘모든 것은 종말을 고한다. 괴로움도, 아픔도, 피도, 굶주림도, 페스트도, 검(劍)도…그런데 왜 우리는 눈을 들어 별들을 보려 하지 않는 걸까? 왜?’

저자도 그랬다. 결코 머리 위에 뜬 별에 의지할 수 없었다. 그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타인들이 보기에는 칠흑 같은 삶의 밤길을 걸을 때가 아니라 햇빛 찬란한 한낮이었다.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예일대와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뒤 ‘뉴요커’ 등에 글을 기고하는 촉망받는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저자.

그가 우울증에 빠졌을 때는 첫 소설이 호평을 얻고 있었고 막 새집도 장만한 시점이었다. 다만 몇 해 전 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자살했던 사건이 그 자신에게 어떤 화인(火印)을 남겼는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이 책은 의사도 심리학자도 철학자도 아니지만 우울증의 늪 한가운데서 살아 돌아온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1000여건에 이르는 타인의 사례를 바탕으로 그 징후, 치료법 등을 살펴본 것이다. 명쾌한 해답은 얻지 못하더라도 동병상련의 사례 읽기를 통해서 ‘우울증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으며 우울증이 슬픔뿐 아니라 사랑과도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저자가 책을 쓴 이유는 ‘우울증 때문에 살아 있는 시체처럼 살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우울증은 중세의 페스트에 버금가는 현대의 돌림병이다. 저자는 미국인 1900만명이 만성적인 우울증을 겪고 있으며 그중에는 어린이 200만명도 포함돼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의 한 조사는 서울에 사는 20∼60세 주부 45%가 경증 이상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저자는 우울증이 ‘현대 서유럽 사회 중산층의 개인적 고통’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남기던 그 시절부터 이미 우울증은 인간의 영혼을 허물어 왔다는 것. 캄보디아, 세네갈, 그린란드 등 ‘현대 도시문명’에서 거리가 먼 사람들도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이 낳은 색다른 우울증에 공격당해 서서히 고사(枯死)한다.

그러나 이 만연한 우울증에 대해 현대의학은 원인이 무엇이며 왜 특정한 치료가 효과적인지 명쾌하게 답을 내지 못한다.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뇌 속 수치를 높여 증세를 경감하는 등의 약물치료가 널리 쓰이고 ‘프로작’이라는 항(抗)우울제가 복음처럼 떠돌지만 저자는 “우울증은 단지 신체 내 화학작용의 이상(異常)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변한다.

“우울증과의 싸움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나의 일부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제거하기 위해 때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정서적 메커니즘까지 손상시켜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딸이 군인들에게 윤간당한 뒤 살해되고 젖먹이 아들이 굶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캄보디아 여인 팔리 누온. 자신처럼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뒤 우울증에 빠져 죽어 가는 여인들을 돕는 쉼터를 만들었던 그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잊고 일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을 전달하기가 가장 힘들지요. 하지만 결국 모두 이해하게 돼요. 그러면 다시 세상에 뛰어들 준비가 갖추어진 거지요.”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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