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빈방’…창조가 거세된 불임의 현대인

  • 입력 2004년 6월 11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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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씨는 “작가로서 내 ‘정년’은 길어야 10년쯤 남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으로는 65세까지만 치열하게 써보려 한다”고
박범신씨는 “작가로서 내 ‘정년’은 길어야 10년쯤 남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으로는 65세까지만 치열하게 써보려 한다”고
◇빈방/박범신 지음/312쪽 9000원 이룸

아무래도 첫 질문은 ‘오로지 글만 쓰면서 살아간다는 일’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작가 박범신씨(58)는 올해 초 10여년간 재직해 온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직을 내던졌다. “겸업(兼業)은 마치 사랑하는 여자를 놓아두고 다른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내 사랑의 지향이 하나라는 것을 이제 세상에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그에게 요즘 심정을 묻자 “습관적으로 살지 않으니 행복하지. 교수는 하다 보면 익숙해지지만, 글 쓰는 건 공포감이 들 정도로 매번 새로우니까”라고 답했다. 그는 “이제 소설 곁에서 죽을 수 있게 됐다”고도 했다.

생활은 어떨까.

“그건 집사람과도 고민한 부분이지만, 솔직히 글만 써서는 먹고 살 수 없어요. 전에 인기 있었을 때 벌어 놓은 걸 까먹으면서 살기로 했지. 나는 그나마 까먹을 거라도 있지만 요즘 젊은 작가들은 정말 걱정되더라고….”

사표를 내고 나서 그는 곧장 짐을 꾸려 문단 선배 박경리씨가 세운 강원 원주시의 토지문학관으로 떠났다. 그곳에 3개월간 머물며 ‘감자꽃 필 때’ ‘흰 건반 검은 건반’ 등 이 소설집에 실린 두 편의 단편을 썼다. 이 두 작품과 이전에 발표한 ‘별똥별’ ‘빈방’ ‘항아리야 항아리야’ ‘괜찮아, 정말 괜찮아’ 등 네 편이 함께 소설집에 수록됐다.

여섯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그의 주제의식은 일관된다. ‘현대는 창조적 생산성이 거세당한 불임의 시대’라는 것이다.

연작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40대 초반의 남성 화가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나’와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애인이었던 ‘혜인’이다. 패션 디자이너인 혜인은 성공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나나 자본주의체제의 경쟁 논리에 떠밀려 헛배불리기 식의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혜인이나 ‘불임’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닮은꼴의 두 사람은 현대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지난해 자전적 소설 ‘더러운 책상’을 냈던 그는 앞으로 강력한 서사가 뒷받침되는 객관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등단 30년이 넘었지만 글쓰기에 대한 열망과 문학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소설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종종 들리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쓰고 싶은 말들이 아직도 수시로 내 갈비뼈 사이를 뚫고 나오니 그런저런 소문을 염두에 둘 겨를이 없다…내 몸 안엔 늙지 않는 예민하고 포악한 어떤 짐승이 살고 있다. 그 놈은 날카롭고 긴 가시발톱을 수없이 갖고 있어서 내가 쓰지 않으면 생살을 찢고 나오려고 지랄발광을 하니 쓸 수밖에 없다….’(‘작가의 말’ 중)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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