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사다리…’ 선진국은 왜 글로벌스탠더드 강요할까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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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328쪽 1만2000원 부키

이 책은 개발경제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쌓고 있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의 저작 ‘Kicking Away the Ladder’의 한국어판이다.

저자는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 고정관념이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정부와 다수 지식인들의 신념이 되다시피 한 글로벌 스탠더드 즉, 자유무역, 자본자유화, 지적재산권 보호, 선진적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수용하지 않고는 한국 경제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우리의 신념체계에 대해 이 책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과 동아시아신흥공업국(NICs)의 역사적 경제발전 경험을 집요하게 추적해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자본주의 발전사를 써내려갔다. 이 점에서 ‘사다리 걷어차기’는 새로 쓰는 자본주의 정사(正史·Official History)라고 할 만하다. 새로운 역사를 쓴 사관(史官)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선진국이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우며 우리에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단계에서 어떤 정책과 제도를 썼는지를 잘 살펴보고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이 반드시 도입해야 하는 것’으로 권고하고 있는 각종 정책은 과거 자신들이 썼던 정책과는 대립되는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

우선 영국은 오랜 기간 높은 관세장벽과 보조금 지급을 통해 국내 산업을 육성했고, 세계 최강의 제조업 강국이 된 1815년 이후에야 세계를 향해 자유무역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100년 이상 영국은 상상을 초월한 보호무역주의적 산업정책을 폈다.

당시 유럽인에게 영국의 이러한 자유무역론은 위선적으로 비쳤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이러한 영국의 태도를 가리켜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비판했고 저자는 그 말을 따서 이 책의 제목을 지었다.

리스트의 역저 ‘정치경제의 국민적 체계’에 따르면 ‘사다리 걷어차기’는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참으로써 다른 이들이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교활한 행위’이다.

영국만이 아니다. 미국은 19세기 ‘근대 보호주의의 모국(母國)이자 철옹성(鐵甕城)’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폈다. 자국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를 때까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외국인의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은 산업스파이 활동을 정부차원에서 지원했을 뿐 아니라 정부가 산업에 직접 참여하고 카르텔의 결성을 유도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등 적극적 산업진흥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정작 선진국 반열에 오른 후 이들은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무역을 주장하고 숙련된 노동인력과 기술의 유출을 금지하는가 하면 특허권 및 상표의 보호에 나선다. 다시 말해 도둑질을 일삼던 이들이 차례로 파수꾼으로 변신한다는 것. 유럽진화적정치경제학회(EAEPE)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군나르 뮈르달 교수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뮈르달상(賞)의 2003년 수상작이다.

김용기기자·국제정치경제학 박사 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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